한 남자가 밤새도록 애타게 알라를 부르고 있었다. 가누기 힘든 고통과 슬픔 때문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악마가 말했다. “조용히 해라. 얼마나 오래 그렇게 주절대고 있을 셈이냐. 그런다고 하늘에서 ‘나 여기 있다!’ 하고 응답할 것 같으냐.” 그러자 그는 낙담하여 고개를 떨궜다. 그 말이 사실인 것만 같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천사가 알라의 전갈을 갖고 나타났다. 천사는 그가 몰라서 그렇지, 알라가 이미 그의 기도에 응답했노라고 말했다. 이런 이유에서였다. 그가 알라를 찾으며 고통을 호소하는 순간, 알라는 그 기도 속에 이미 들어와 있었다. 고통과 호소가 전령이 되어 알라에게 알렸기 때문이다. 기도 자체가 응답이고, ‘오 알라여!’라는 말 자체가 ‘나 여기 있다!’라는 응답이었다. 신은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가 아니라 슬퍼하고 아파하는 인간 옆에서 같이 슬퍼하고 아파함으로써 인간의 기도에 응답하는 존재라는 말이었다. 그러니 너무 절망하지 말고, 인간이 모르는 사이에 인간을 위로하고 있는 신의 현존을 잊지 말라는 전언이었다.
아리송하고 모순적이기까지 한 말이지만 그래도 조금은, 아주 조금은 위로가 된다. 신을 인간 곁으로 오게 만드는 고통, 루미는 역설적으로 그 고통 안에서 위로와 치유의 빛을 찾으려 했던 시인이자 철학자였다. 그의 시가 수백 년이 흘렀어도 호소력을 잃지 않는 이유다.
왕은철 문학평론가·전북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