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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명품 커피’ 한잔에 담긴 시큼씁쓸한 진실

입력 | 2019-06-08 03:00:00

◇전쟁 말고 커피/데이브 에거스 지음·강동혁 옮김/432쪽·1만5000원·문학동네




‘커피계의 애플’ 블루보틀이 5월 한국에서도 서울 성수동에 1호점을 냈다. 블루보틀은 속도보다 품질에 초점을 맞춰 성공을 거둔 브랜드. 이 책의 주인공인 목타르가 2016년 예멘에서 들여온 최고급 커피를 블루보틀 매장에서 처음 판 것도 그런 이해관계가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상당수는 한 잔에 2만 원 가까이 하는 커피를 마시는 걸 ‘미친 짓’이나 ‘사치’라 부를 수 있다. 하지만 블루보틀에서도 가장 비싸던 이 커피에는 예멘의 역사와 공정무역, 위험수당까지 다양한 스토리가 담겨 있다. 어쩌면 고객들은 그 커피의 맛만큼이나 풍부한 이야기에 지갑을 연 게 아닐까. 문학동네 제공

요즘 극적인 스포츠 경기나 희한한 사건을 마주하면 꽤나 쓰는 말이 있다.

“영화나 드라마였으면 막장이라고 욕먹었겠다.”

너무 의외라 장삼이사(張三李四)의 인식 범위를 벗어나면 현실감이 떨어진다. 아마 이 책을 읽는 이들도 비슷한 체험을 하게 되리라. 이게 진짜 실제로 벌어진 일일까.

일단 ‘전쟁 말고…’의 뼈대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개천에서 용 난 성공 신화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빈민가에서 태어난 사내. 가진 건 쥐뿔도 없지만 굳은 신념으로 역경을 뚫고 대박을 터뜨린다. 지금 당장 서점에 달려가도 닮은꼴 수백 권은 찾을 만큼 뻔한 스토리다.

하지만 발라냈던 살을 다시 붙여 가면 분위기는 180도 달라진다. 주인공 목타르 알칸샬리는 예멘계 미국인이다. 이슬람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미국 하류층에서 자랐다. 예멘에 가면 미국인이라서, 미국에선 아랍인이라고 눈총을 받는다. 어릴 때부터 공부는 뒷전인 문제아였지만 타고난 재능은 있어 어디에 내놔도 제 밥벌이를 하긴 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유레카’를 외칠 일이 생긴다. 커피에 인생을 걸기로 결심한다. 커피의 발상지가 예멘인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좋은 커피는 와인만큼 비싼 값을 받을 수 있단 것도. 하지만 ‘모카’의 기원일 정도인 예멘은 오랜 전쟁을 치르며 세계 커피 시장에서 미미한 존재가 된 지 오래. 게다가 여전히 그곳의 치안은 불안하기 그지없다.

결론적으로 그는 대단한 성공을 거두긴 했다. 목타르가 어렵사리 미국 수입에 성공한 ‘하이마 농장산 커피’는 “천사의 노래”란 극찬을 받으며 2017년 커피 평가지 역사상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다. 이 커피는 최근 한국에서도 화제인 블루보틀에서 한 잔에 16달러(약 1만9000원)에 내놓았다. 그런데도 없어서 못 판단다.

그런데 좀 기분이 께적지근하다. 이 ‘위대한’ 인물에 경의를 표할 맘은 좀처럼 들질 않는다. 목타르가 성공을 위해서만 한 몸을 바친 게 아니란 건 안다. 천대받는 예멘 커피를 세계에 알리려 했던 사명감도 이해한다. 근데 그게 수류탄을 들고 현지 고리대금업자와 담판을 지어야 할 정도로 꼭 필요한 일이었을까. 게다가 꽤 여러 번 요행이 작용하지 않았다면, 가족과 친구는 그가 어디서 죽었는지도 모를 뻔했다. 특히 애들에겐 전혀 들려주고 싶은 영웅담이 아니다.

하지만 그의 기상천외한 모험이 드러낸 세상의 속살은 결코 가볍지 않다. 우리가 손쉽게 마시는 커피에 얼마나 많은 땀과 눈물이 스며 있는지 괜스레 경건해질 정도다. 또 미국이건 중동이건, 종교 인종 빈부 갈등 아래 신음하는 많은 이들의 희생을 소스라치게 일깨운다. 아마도 소설가이자 사회운동가인 저자 역시 개인의 성공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을 게다.

다시 한번 되짚어 보자. 이건 훌륭한 농장에서 커피를 수입해 걸맞은 가격으로 팔아 성공한 이의 이야기다. 이토록 간명한 사업이 왜 자칫하면 목숨을 잃고 수많은 감시와 검사를 받아야 할 일이 돼 버린 것일까. 어쩌면 목타르는 커피가 아니라 ‘삶의 진실’을 미국으로 가져온 게 아닐는지. 불공평과 비도덕이 관행과 현실로 포장되는 세상을. 설탕과 우유로 아무리 가린들, 커피는 원래 쓰고 시큼하다. 우리가 오랫동안 길들여졌을 뿐.

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