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앨범 '아베크 피아노' 'La Mer' 등 연주곡 8편
싱어송라이터 정재형(49)은 파도의 섭리에 경이로움을 느꼈다. 일본 도쿄에서 기차로 한시간가량 떨어져있는 바다마을 가마쿠라, 작년 5월 KBS 제2FM ‘정재형·문희준의 즐거운 생활’ DJ에서 물러난 다음날 가마쿠라로 향했다.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농구 만화 ‘슬램덩크’의 배경이 된 곳이자,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촬영지.
관광도시로 유명해졌지만, 아직 사람의 흔적이 닿지 않은 곳들도 많다. 정재형은 이곳 산꼭대기에 방 하나, 거실 하나가 있는 산장을 구했다. 낮이고, 밤이고 파도소리만 들렸다. 계단을 100개 이상 올라야 하는 곳이어서, 피아노도 한국 엔터테인먼트사 현지법인 관계자들의 도움을 받아 올렸다.
이렇게 나오는 음반이 정재형이 9년 만인 10일 선보이는 ‘아베크 피아노’다. 2010년 ‘르 프티 피아노’ 이후 처음 내놓는 새 음반이다.
타이틀곡 ‘라 메르(La Mer)’는 프랑스어로 ‘바다’라는 뜻이다. 잔잔하다가 맹렬하다가, 바다처럼 파도처럼 전개가 극적이다. 멜로디는 구석구석 가슴 아픈 일들을 치유하듯 어루만진다. 바이올리니스트 백주영의 애틋하면서도 드라마틱한 바이올린 선율이 더해졌다.
‘라 메르’를 포함, 8트랙이 실린 연주곡 앨범이다. 앨범 제명은 ‘피아노와 함께’라는 뜻이다. 오케스트라, 첼로, 바이올린, 비올라 등 다양한 악기들과 피아노의 만남을 담았다.
국내에서 보기 드문 실내악 기반의 대중음악 앨범. 오케스트라 사운드가 녹아들어갔지만 ‘미스트럴’은 듀오, ‘서머 스윔’은 퀸텟으로 연주하는 등 클래식음악에서도 난이도가 높은 고급 실내악을 들을 수 있다.
국내에서 대중음악 카테고리에 클래식 음악을 이질감 없이 녹여넣을 수 있는 뮤지션은 몇 없다. 한양대 작곡가를 나온 정재형의 음악은 클래식 바탕이다. 대학 재학 시절인 1995년 클래식과 대중음악을 결합한 음악을 선보인 3인 밴드 ‘베이시스’로 데뷔, ‘내가 날 버린 이유’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 줘’ 등의 히트곡을 냈다. 이후 프랑스 파리 고등사범 음악학교에서 영화음악과 작곡, 최고연주자 과정을 밟았다.
정재형은 “이런 앨범을 낼 수 있는 환경이 역설적으로 고맙다”며 웃었다. “어떤 뮤지션이 이런 좋은 환경에서 이런 작업을 할 수 있을까요. 외롭지는 않아요. 그리고 저는 제 음악이 가요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어떻게 들려드릴까에 대한 고민은 있었지만 감사함이 컸어요.”
4, 5년 전부터 발매를 예고한 앨범이 이제야 나온 이유는 “그림이 안 그려져서”라고 털어놓았다. “파리에서 클래식음악, 영화음악을 공부하면서 모든 정황이 쉽지는 않았어요. 그래도 끙끙대고 하면서 어떤 음악을 해도 전환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피아노를 재료로 소규모 편성을 하려고 하니, 막상 막막한 거예요.”
전작 ‘르 프티 피아노’는 클래식 피아노 연주곡을 담았다. 이번에는 실내악만 담고, 다음 앨범에 오케스트라 곡을 담을 예정이었다. 점점 악기 편성이 확장되는 식이다. 하지만 이번 앨범에 오케스트라가 들어오면서 계획이 틀어졌다. 그래도 정재형은 만족스럽다.
“처음에는 너무 힘드니까 도망가려고 했어요. 소속사 안테나뮤직 덕분에 버텼죠. ‘이것이 안테나의 힘이구나’라는 것을 느꼈죠. 특히 힘을 실어준 유희열 대표가 고마워요.” 안테나뮤직의 대표인 작곡가 겸 프로듀서 유희열(48)은 정재형과 절친한 음악 동료다. 그 역시 서울대 음대를 나온 클래식 기반의 대중음악 뮤지션이다.
김상진 그리고 그 덕에 만난 백주영을 비롯, 이번에는 클래식 음악 연주자들이 힘을 보탰다. ‘미스트럴’에 참여한 첼리스트 심준호, ‘서머 스윔’에 참여한 바이올리니스트 김덕우는 서울시향 단원들이다.
좋은 음반을 만들고 쟁쟁한 세션과 함께 했음에도 정재형은 “지금 이 순간 자체도 어떻게 들릴까 고민을 하고 있다”고 한다. “매번 작업물에 확신을 할 수 직업은 아닌 것 같아요. 계속 저를 의심하고 불확신 속 불안정 상태에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라는 것이다.
영화 ‘중독’, ‘오로라 공주’ OST 작업에도 참여한 정재형은 빅토르 위고의 ‘웃는 남자’를 모티브로 삼은 뮤지컬도 약 5년 전부터 작업하고 있다. “많은 서사를 2시간으로 정리하는 것이 어려워 끙끙거리고 있다”면서 “영화 음악을 통해 배웠던 것들을 뮤지컬에서 또 다른 방향으로 풀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쉽지 않더라. 뮤지컬 관계자들과 계속 논의 중”이라고 했다.
고급 대중음악을 선보이지만 자의식의 과잉은 없다는 점도 정재형의 특징이다. MBC TV ‘무한도전’에서 ‘음악 요정’으로 불리는 등 예능 프로그램에서 과감히 망가지기도 하고, ‘순정마초’ 같은 유머 코드가 다분한 곡도 만든다. 새 앨범 발표와 함께 방송 프로그램 출연도 준비하고 있다.
“극과 극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사실 제 음악은 쉽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제가 하고 싶어 하는 음악이죠. 방송을 통해서 중간 지점을 모아보자는 생각이 있어요.”
음악을 향한 애정이 여전하기 때문에 가능한 유연성이다. 이번 앨범 작업 중간 지점에 몰입하는 순간, ‘음악하기를 잘했구나’라는 생각이 오랜만에 찾아왔다고 한다.
“오랜만에 음악으로 인해 울컥했어요. ‘음악이 위로를 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죠. 한때는 남을 부러워하는 시선이 있었는데, 지금은 제 안의 행복함이 많아요. 그런 마음이 전해졌으면 해요.”
지난해에는 파도 소리가 무서웠지만 이제 편해졌다. 심장 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서핑도 좋아하는 그는 이번 앨범 작업을 하면서 ‘바다가 인생 같다’는 말을 실감했다.
“잔잔한 것 같으면서도 그 안에 들어가면 파도의 센 힘에 밀려나기도 하죠. 다들 애쓰고 있구나, 라는 생각에 서글픔도 들어요. 근데 거칠고 힘든 인생이지만 ‘조금씩 앞으로 나가보자’는 생각을 다들 하고 있다고 여겨요. 서핑을 할 때 처음에 다른 사람이 도와주지 않으면 앞으로 나가지 못하거든요. 인생도 비슷해요. 평가하는 것보다 응원해줄 수 있는 마음이 소중하게 느껴져 ‘라 메르’를 썼습니다.”
흰 바탕에 피아노가 한 가운데 자리 잡은 이번 앨범 커버에서 눈에 띄는 것은 피아노의 검은 그림자다. 바다의 이면을 톺아볼 수 있다는 것은, 연주와 인생 역시 그렇게 바라본다는 얘기다. 음악뿐 아니라 정재형의 삶과 마음도 화음을 만들어내는 음표였다. 흰 건반과 검은 건반을 오가는 피아노처럼 인생 또한 흰색과 검은색을 번갈아 가며 연주한다.
【서울=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