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은 워싱턴 특파원
4일(현지 시간) 미 워싱턴 한미경제연구소(KEI)에서 열린 국제안보콘퍼런스. 패널로 나선 대북 전문가 고든 창 변호사(68)가 중국 이동통신사 화웨이에 대한 미국의 규제 관련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창 변호사는 “화웨이가 자사 서버를 이용해 미 기업 정보를 몰래 빼낸 후 이를 중국 베이징으로 전송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사례와 증거들이 있다. 미국은 엄중히 대응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루 전 워싱턴 우드로윌슨센터에서 열린 한미 전문가 라운드테이블에서도 비슷한 기류를 느꼈다. 지한파 미 전문가들조차 “미중 사이에서 선택을 꺼리는 한국의 입장은 (얼핏 보면) 합리적 접근일지 모르나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는 선택을 원한다”는 말을 반복했다. 한국 측 인사들이 “미국이 그런 식으로 한국을 압박하면 안 된다. 중국 바로 옆에 있는 한국이 느끼는 부담은 워싱턴에서 느끼는 것보다 훨씬 크다”고 반박했지만 일부 미 인사의 얼굴엔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인상이 짙었다.
한국만 이런 압박을 느끼는 것도 아니다. 서유럽과 동남아 주요 국가들도 마찬가지다. 특히 수출입 모두 미국의 최대 교역 파트너인 유럽연합(EU)은 골머리를 앓고 있다.
‘EU가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극도로 불편한 입장에 놓였다’(워싱턴 국제안보분석연구소), ‘미중 간 격전지가 된 EU가 외교 시험대에 놓였다’(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 같은 싱크탱크 및 외신의 분석과 평가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달 말 왕치산(王岐山) 중국 국가부주석이 독일과 네덜란드 방문 계획을 발표하자마자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도 맞불 작전을 펼쳤다. 폼페이오 장관은 곧바로 왕 부주석이 방문한 국가들을 포함한 유럽 순방 일정을 발표했다.
외부로부터 외교적 선택을 강요당할 때의 대응은 ‘명분’이 아니라 ‘실리’에 바탕을 둔 것이어야 한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선택을 요구하는 압박 속에서도 입장 표명을 유보한 채 버티는 것도 바로 이런 점을 염두에 뒀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은 “우리는 실리적이고 현실적인 사람들”이라는 말만 되풀이한다.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국제 정세 변화 속에선 신중론이 최선의 방책이기 때문일 것이다.
점차 격해질 미중 패권 경쟁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함정에 빠지는 것을 피하는 전략적 대응이 절실하다. 미중 무역전쟁이 지금은 과열로 치닫고 있지만, 양국 정상이 극적인 합의를 이룰 가능성도 없지 않다. 섣부른 선택은 양국의 합의가 끝난 뒤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다. 성의껏 상대를 대하고 한국의 현실에 대해 솔직하게 대화하는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는 기본에 충실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인 것 같다.
이정은 워싱턴 특파원 light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