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학술대회서 집중 재조명
6·10만세운동 가담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학생들의 첫 번째 공판 소식을 보도한 1926년 6월 25일자 동아일보 2면. 동아일보DB
1926년 4월 27일자 동아일보는 식민지 조선인들의 비통한 마음을 담아 조선 왕조의 마지막 군주인 순종의 승하 소식을 알린다. 망국의 슬픔과 일제의 교묘한 문화통치에 신음하던 한반도는 이때부터 새로운 움직임이 꿈틀댔다. 순종 인산일인 6월 10일에 맞춰 대규모 만세시위운동을 국내외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했다.
100년 전 한반도 전역을 뒤덮은 3·1운동은 단지 1919년만의 기억이 아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태동시켜 독립운동 세력의 구심점을 마련했고, 일제강점기 내내 이어진 한국 독립운동의 뿌리로 여겨졌다. 그중에도 1926년 6·10만세운동은 이념을 떠나 온 민족이 합심해 일어난 3·1운동의 정신을 가장 온전하게 계승한 사건이었다. 최근 학계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6·10만세운동의 역사적 가치도 새롭게 규명하는 작업이 화두로 떠올랐다. 10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는 6·10만세운동기념사업회 주최로 ‘6·10만세운동과 민족통합’ 학술대회가 열린다.
가만히 있을 일제가 아니었다. 이미 3·1운동이란 뼈아픈 충격을 겪은 일제 경찰은 대대적인 검열과 단속에 나섰다. 결국 거사 직전인 6월 6, 7일 대한독립당과 관련된 인사들이 무더기로 적발됐다. 이들이 준비한 격문마저 압수당하고 만다.
그럼에도 끝내 발각되지 않은 국내 세력이 있었다. 조선학생과학연구회 등 사회주의 계열 학생단체와 통동(현 통인동) 인근에 주로 거주해 ‘통동계’로 불린 중앙고보, 중동학교 학생들은 은밀하게 거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조선 민족아 우리의 철천지원수는 자본제국주의 일본이다. 2천만 동포야 죽음을 결단코 싸우자. 만세 만세 조선독립만세.” 통동계 학생들이 작성한 이 격문은 간략하지만 결의에 찬 독립 의지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들은 5000장을 몰래 인쇄해 순종의 인산일까지 지켜냈다.
이어 청계천 관수교 부근에 이르자 다시 연희전문학교 학생 50여 명이 격문 50장을 살포했다. 오전 9시 경성사범학교 앞에서 일어난 격렬한 만세시위로 인해 학교 담장이 무너질 정도였다. 이후 동대문 부인병원, 창신동 채석장, 신설동 고무회사 앞까지. 이들은 가슴 속에 간직한 태극기와 격문을 꺼내 들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장석흥 국민대 한국역사학과 교수는 “3·1운동 당시 보조자 역할이었던 학생들은 6·10만세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의 주축으로 떠올랐다는 점에서 독립운동세력의 세대교체를 알린 역사적 사건”이라고 설명했다.
○ 민족대통합 운동 촉발시킨 6·10만세운동
“이 운동은 전 민중의 중심이 될 통일기관을 필요로 한다. 내부의 쟁투를 그치고 공동의 적인 일본인과 싸울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도산 안창호는 그해 7월 16일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6·10만세운동 연설회’에서 이같이 말했다. 이후 중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은 민족대당촉성운동을 각지에서 일으키며 한때 분열되고 침체됐던 독립운동에 통합이라는 새로운 활력을 만들어냈다. 장 교수는 “일제는 6·10만세운동을 학생들의 치기 어린 행동으로 축소·은폐하기 위해 혈안이 돼 있었다”며 “6·10만세운동은 정치적 이념을 넘어 항일이라는 깃발 아래 전 민족이 힘을 합친 결과였다”고 밝혔다.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교수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그 뜻을 계승한 6·10만세운동을 국가기념일로 계승하는 것이 100주년을 맞은 우리 사회의 당면과제”라며 “학계뿐 아니라 정부와 민간의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