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오늘과 내일/정연욱]벵가지 전략

입력 | 2019-06-11 03:00:00

2017 대선서 적폐 심판론 주효… 총선, 적폐론 재탕은 역풍 불 것




정연욱 논설위원

박근혜 대통령 탄핵으로 촉발된 2017년 5월 대통령선거는 사실상 심판 선거였다. 이전 보수 정치세력이 ‘적폐세력’으로 정조준됐다. 과거보다는 미래 비전을 놓고 겨룬다는 대선 캠페인의 고전적 공식은 깨졌다. 문재인 캠프 내부에서 한때 ‘적폐청산’ 구호가 대선 메시지에 맞지 않다는 주장도 제기됐지만 이내 묻혀 버렸다. 그만큼 적폐청산 메시지는 강력했다.

대선 승리 후 적폐청산은 ‘시대정신’으로까지 격상됐다. 정권이 출범하자마자 일제히 각 부처에 적폐청산 태스크포스(TF)가 만들어졌다. 이전 정권을 겨냥한 적폐청산 드라이브는 거칠 것이 없었다. 기밀 공개 논란이 있었지만 ‘알 권리’를 앞세워 박근혜 청와대 캐비닛 문건도 공개했다. 최근 외교부 직원의 한미 정상 통화내용 기밀 유출을 다룰 정도의 엄격함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문재인 정부 집권 3년 차를 맞으면서 적폐청산의 피로감은 커졌다. 법무부 검찰과거사위원회의 조사는 편향성 시비를 낳으면서 역풍을 맞고 있다. 박근혜 정부에서 김학의 수사 외압 혐의를 받은 곽상도 의원(전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은 무혐의 처분이 나오자 문재인 대통령을 직권남용 혐의로 고발하기로 했다.

검찰이 ‘공관병 갑질’ 혐의로 재수사를 벌인 박찬주 전 육군 대장도 무혐의 처리됐다. 박찬주는 “현역 대장을 잡아 망신을 줘 군을 장악하려 했다”고 일갈했다. 2017년 촛불 정국 때 작성된 옛 국군기무사령부의 계엄령 검토 문건 의혹 수사는 용두사미로 끝났다. 대통령 특별지시로 민군 합동수사단까지 구성됐고, 여권은 박근혜 전 대통령, 황교안 전 대통령 권한대행에 대해 내란음모죄까지 거론하며 여론전을 벌였지만 이들의 관련 진술이나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이 정도면 ‘아니면 말고’식 조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016년 미국 대선을 앞두고 공화당은 하원 다수당의 이점을 살려 민주당의 유력 대선후보인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을 겨냥해 파상 공세를 폈다. 힐러리가 국무장관 재임 중이던 2012년 리비아 벵가지 미국대사관에서 벌어진 테러 공격의 진상과 책임을 규명하겠다며 2014년 하원 특별조사위까지 구성했다.

공화당의 공격은 전방위에 걸쳐 집요했다. 힐러리를 포함해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합참의장 등 정부 인사들을 수시로 청문회에 불러냈다. 이 과정에서 뜻밖의 성과를 올렸다. 힐러리가 벵가지 테러 관련 정보를 사용 금지된 개인 e메일 계정을 통해 보고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2016년 대선 때 힐러리는 이 공격에 시달렸다. 미국 언론은 로버트 뮬러 특검 보고서 공개 이후 민주당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향해 ‘벵가지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문 대통령은 지난달 국민 통합을 위해 적폐청산의 속도 조절을 주문한 사회 원로들에게 중단 없는 적폐청산을 강조했다. 미국식 벵가지 전략이 계속될 것임을 예고한 것이다.

내년 4월 총선을 놓고 민주당은 “‘과거로 가는 정당이냐, 미래로 가는 정당이냐’라는 대결구도가 될 것”이라고 했다. 이전 정권을 조준한 적폐청산 공세는 그 뒤를 이은 제1야당을 ‘과거’ 프레임에 가둬놓는 호재가 될 수 있다. 여권은 총선에 내세울 간판 상품이 마땅찮으면 다시 특기를 살려 자유한국당을 향한 적폐 공세에 집중할 태세다. 여의도에선 벌써부터 이런저런 시나리오가 나돌고 있다. 우리가 뚜렷하게 내세울 것이 없어도 적폐세력인 제1야당에 표를 줄 수 없지 않으냐는 논리일 것이다. 하지만 총선은 현 정권을 심판하는 중간 평가에 가깝다. 네거티브에 의한 득표는 한계가 있다. 더욱이 내년은 집권 4년 차다. 여권의 적폐청산 벵가지 전략은 너무 식상해 보인다.
 
정연욱 논설위원 jyw1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