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충일 추념사와 강연료 1550만원… 고장 난 균형감각 드러낸 징후들 공동체 ‘정서적 안녕’ 지키는 것은 이념에 앞서 ‘인간에 대한 예의’ 겸손과 절제의 가치 되살려야
고미석 논설위원
이는 자신의 쓰라린 실패들에서 길어 올린 교훈이다. 총장 시절 숱한 반대 속에 뉴욕 캠퍼스 신설을 추진하다 중도 포기한 것이 대표적이다. 핵심 인력을 대거 투입하고 제안서 작성에만 100만 달러를 투입한 야심 찬 프로젝트였으나, 시 당국의 요구 조건을 받아들이는 것이 무리라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스스로 중단 결정을 내렸다. 판단 오류를 인정하고 손실을 최소화하는 선에서 신속하게 손을 뗀 것이다. 이 일로 그는 비난을 받기보다 되레 리더 자질을 높이 평가받았다. 자신의 실수와 실패, 이에 따른 거센 비난을 받아들일 마음바탕 없이 리더의 자리를 맡아서는 안 된다는 배움을 실행한 덕분이다.
어려운 순간에 진정한 성품이 드러난다 했던가. 유명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브룩스는 저서 ‘인간의 품격’에서 인간은 내면에 결함을 가진 ‘뒤틀린 목재’라는 전통적 관점을 강조하면서 이를 극복한 사례를 소개한다. 가령, 불같은 성미를 중용과 겸양의 미덕으로 제어했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등장한다. 그는 분노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독특한 전략을 사용했다. 화나게 하는 이들의 이름을 일기에 적어 봉인하거나 때로는 종이에 써서 쓰레기통에 버리는 방법으로 증오심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애썼다. “분노로는 이길 수 없다. 분노에 휩싸여서는 생각조차 명확하게 할 수가 없다”는 신념으로 스스로와 싸워 이겨 상대들을 넘어선 것이다.
한국 사회의 균형 감각에 균열을 보여주는 일이 잦아지는 듯하다. 겸손과 절제의 자세를 잃은 사회의 민낯이 아닌지 걱정스럽다. 대통령의 현충일 추념사에 난데없이 언급된 ‘김원봉’ 파문이 그렇다. 평소 불협화음과 달리 이날만큼은 온 국민이 모처럼 하나 될 수 있었을 자리를 애써 차버렸다는 점에서 착잡하다. 먼 통일보다 가깝다고 생각한 통합이 한발 더 멀어진 느낌이라고 할까. 불현듯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는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의 경고가 생각난다.
모름지기 개인적 견문에 바탕을 둔 사적 영역 언어와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다짐한 리더의 공적 언어는 격이 달라야 한다. 혹여, 직장 내 성희롱 예방 교육에서 늘 강조하는 사항이 참고가 될지 모르겠다. 말한 이의 취지와 의도에 상관없이 그 표현이 듣는 사람에게 불쾌감이나 상처가 된다면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추념사 내용이 사회적 파장을 불러온다는 점을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든, 그럴 줄 알고도 밀어붙인 것이든 어딘가 심각한 오작동의 사례 아닐까. 결국 청와대가 ‘김원봉 서훈 불가능’을 못 박았으니 이런 무의미한 일로 국정 에너지를 허송하면 집권 세력에 무슨 득이 될까 싶다.
친여 방송인의 90분 강연 대가로 나랏돈 1550만 원을 책정했다가 결국 취소한 소동 역시 어안이 벙벙하다. 거대 노조의 힘자랑은 익히 알았지만 그 욕망의 분출 대상에 일용직도 포함된다는 것 역시 믿기 힘든 현실이다. 이로 인한 비판을 ‘트집’으로 치부해 이념 뒤에 숨기를 반복한다면 회생 가능성은 절망적이다.
지금 우리 공동체의 정서적 안녕을 흔드는 것은 이념에 앞서 ‘인간에 대한 예의’의 문제일 수 있다. 앞서 말한 존 헤네시는 겸손과 절제는 타고나는 것이라기보다 연마되는 습관이라고 재정의한다. 그의 한국어판 저서 제목은 ‘어른은 어떻게 성장하는가’이다. 그리고 책 속에 나온 힌트는 이렇다. ‘고개를 숙일 때마다 성장한다.’ 겸양의 가치를 존중하는 마음 자세는 성숙함의 지표다. 특히 리더에게는 당연한 의무일 터다. 설익은 사회를 성숙한 공동체로 이끌기 위한.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