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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언의 마음의 지도]헤어지는 법을 연습하세요

입력 | 2019-06-12 03:00:00


일러스트레이션 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

만나면 결국 헤어지게 돼 있습니다. 사람, 물건은 물론이고 이사 가면 집과도 헤어집니다. 삶은 헤어짐의 연속입니다. 영원한 관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수명이 다하면 버려야 합니다. 물건과 잘 헤어지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집안이 엉망이 되지만 곧 익숙해집니다. 사람이 물건을 모시고 사는 꼴이 됩니다. 저도 좀 그렇습니다. 자료라고 우기면서 엄청난 양의 책과 서류를 모시고 살아왔습니다. 결심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정리법’도 공부해 봤습니다. 전망이 그리 밝지 않습니다만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심정으로 매일 조금씩 꾸준히 해 보려 합니다. 사람과 헤어지는 일은 인생 그 자체입니다. 나이가 들면 주변 사람들이 사라집니다. 세상을 뜨거나, 병으로 움직이지 못하거나, 여유가 없어 참여를 못 합니다. 자연의 순리입니다. 안타깝지만 받아들입니다.

진즉 헤어져야 할 사람과 아직도 그러고 있는 경우도 흔합니다. 만약 나를 교묘하게 괴롭히고 이용하는 사람과 헤어지지 못하고 계속 상처를 입고 고통받고 있다면 매우 심각합니다. 해결 방법을 같이 궁리해 보시겠어요? 일단 내가 그에게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둘째, 원인은? 해답은 남이 아닌 궁극적으로 내 마음에 숨어 있습니다. 셋째, 일단 파악이 되고 결심이 서면 망설이지 말고 과감하게 실행해야 합니다. 오랜 인연이니 당연히 주저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포기합니다. 헤어져야 마음의 평화를 얻습니다. 망설임의 뿌리는 누군가에게 의존하고 싶다는 욕구입니다. 세상에 사람은 아주 많고 그 사람과 헤어져도 세상이 무너지지 않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맺는 관계는 복잡합니다. 더욱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다소의 가학증(加虐症), 피학증(被虐症) 성향이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듭니다. 가학증은 다른 사람의 고통에서 자신의 즐거움을 찾는 성향이고, 피학증은 남이 내게 주는 고통에서 즐거움을 찾는 겁니다. 너무 지나치면 치료받아야 할 병이지만 소위 보통 사람들 간에도 이런 일들을 흔히 주고받습니다. 나를 괴롭히는 그 사람과 내가 쉽게 헤어지지 못하는 원인은 가학증에 너무 오래 노출돼 길들여져 습관처럼 유지되는 피학증입니다. 풀려난 인질이 자신을 가해한 범인을 두둔하는 모순적 행위에도 비슷한 일이 숨어 있습니다. 헤어져야만 한다면 잘 헤어져야 합니다. 복수의 칼을 갈며 인생을 허비하기보다는 내가 그 사람보다 더 오래, 더 행복하게 살아야 진정한 복수를 실현하는 겁니다. 헤어짐이 어설프면 인생이 꼬이는 후유증을 앓습니다.

모든 헤어짐은 그간 맺어 온 관계의 해소입니다. 절대적인 형태는 ‘상대의 죽음’입니다. 산 사람인 내게 죽은 사람을 상실한 경험이 닥칩니다. 상실(喪失)은 가치관, 의욕, 자격 상실과 같이 ‘잃어버림’으로 넓게 정의되지만 ‘잃을 실(失)’뿐 아니라 ‘죽을 상(喪)’도 포함돼 있어 흥미롭습니다. 상실, 특히 사람을 잃어버리면 애도(哀悼)가 따라옵니다. 애도하는 사람은 슬퍼하고 또 슬퍼합니다. 애도는 적절해야 하고 한 여섯 달쯤 지나면 묽어지면서 정리돼야 합니다. 부모님이나 배우자나 자식의 죽음을 어찌 그리 쉽게 잊을 수 있냐고요? 옛날 분들의 말씀처럼 산 사람은 살아야 합니다. 세상을 떠난 사람들에 대한 살아있는 사람의 도리입니다. 애도가 지나치거나 너무 오래 지속되면 우울증에 빠집니다. 애도하고, 살아남고, 잘 지내는 것이 자연의 섭리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힘든 헤어짐은 나와 헤어지는 겁니다. 지금까지의 나를 계속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날 것인가. 변화를 소망하면서 변화를 두려워하는 존재가 사람입니다. 기존의 나와 헤어지는 일은 정말 힘이 듭니다. 익숙한 나와 헤어져서 성숙한 나를 발견한다면 인생에서 손꼽을 만큼 가치 있는 일입니다. 과정은 어렵습니다. 할 수 있다고 느끼는 동시에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괴롭힙니다.

만남도 헤어짐도 독특한 관계가 있습니다. 정신분석가와 분석을 받는 사람 사이입니다. 분석은 수년 동안 분석가와 분석을 받는 사람이 사회적 관계가 아닌, 특수한 치료적 관계를 기반으로 협력해 이루는 치료입니다. 이 역시 언젠가 끝나야 합니다. 분석의 종결이라고 합니다. 종결을 지나치게 일찍 해도, 너무 오래 지연시켜도 생각을 깊이 해야 할 어려운 문제입니다. 조급하게 떠나려 하는 사람도, 헤어짐을 어려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일주일에 네 번, 한 번에 거의 한 시간, 수년에 걸쳐 누구를 만났다면 어찌 쉽게 헤어질 수 있겠습니까. 멀지만 친밀한 관계를 기반으로 분석이 이루어져야 하나, 오래 누적된 친밀함이 헤어짐을 어렵게 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제대로 된 분석이라면 헤어짐은 분석적 논의의 대상이 되고 헤어진 이후에 분석가의 존재는 떠나는 사람의 마음에 자리 잡아 스스로 하는, 자기 분석의 기초가 될 겁니다.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