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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속에 꼭꼭 숨은 ‘불친절한 공간’… 젊은 감성 유혹

입력 | 2019-06-12 03:00:00

회현동 복합문화공간 ‘피크닉’




전시를 관람하면 입장할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 피크닉의 루프톱 공간. 서울 중구 남산과 회현동 일대 풍경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곳이기도 하다. 사진은 산업디자이너 재스퍼 모리슨이 디자인한 가구를 전시한 모습. 글린트 제공

왁자지껄한 서울 남대문시장 건너편인 중구 회현동의 한 골목. 세월을 머금은 빌라와 상가, 게스트하우스가 복잡하게 얽힌 언덕길을 올라가다 보면 ‘piknic’이라고 적힌 흰 표지판이 눈에 띈다. 간판 위 얇은 화살표를 따라 발길을 재촉하면 흰 바탕 위 짙은 갈색 나무 쪽문이 보인다. 처음 이곳을 찾은 이라면 이 문은 당황스럽다. 밀어야 하나, 당겨야 하나, 아님 옆으로 밀어야 할까. 지난해 개관한 복합문화공간 ‘피크닉(piknic)’은 이 문처럼 묘한 공간이다. 사근사근하진 않지만 묵묵하게 동네를 바꾸고 있는.

오렌지 빛 타일로 꾸며진 피크닉의 건물은 1979년 완공한 한 제약회사의 본사였다. 그 뒤 ‘효림빌딩’이란 이름의 임대사무실로 쓰이다, 2017년 전시기획사 글린트가 인수하며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했다. 뼈대는 그대로 둔 채, 푸른색 기와 모양 지붕과 창문 프레임을 바꾸는 등 군더더기를 제거했다.

리모델링 설계를 맡은 NIA건축 최종훈 대표는 피크닉 자체가 오브제가 아니라 배경으로서의 건축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남산을 비롯한 주변과의 조화와 건축의 원래 기능에 집중했다는 뜻이다. 그 결과 장식적 요소는 제거하고 기본만 갖춘 미니멀리즘적 공간이 탄생했다. 안내판이나 설명을 최소화한 것도 ‘의도된 불친절’이다.

내리막길에 들어서면 보이는 피크닉의 정면 모습과 오른쪽 유리 온실, 오후 6시부터 바로 운영하는 1층 카페 피크닉, 과거부터 그대로 남아 있는 층계의 오래된 나무 손잡이(왼쪽부터). 글린트 제공

피크닉은 입구가 두 군데지만 찾기가 쉽지 않다. 남산 쪽 정문은 대로에서 보이지 않고, 주차장을 넘어 내리막길 앞까지 와야 보인다. 주소를 알고 와도 헤맬 정도라 “큰마음 먹고 와야 하는 곳”이란 볼멘소리도 나온다. 이가영 글린트 기획팀장은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공간 사용법을 정해 주기보다 직접 경험하고 즐기도록 하고 싶었다”며 “숨겨진 공간에서 보물찾기 하듯 각자 다른 감각을 찾았으면 좋겠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평일 낮에도 발길이 꾸준히 이어진다. 지하 1층∼지상 4층에 들어선 전시 공간과 카페, 레스토랑, 디자인숍이 있다. 1층 카페는 ‘카페가 개념미술 작품처럼 보일 수 없을까’라는 고민에서 출발했다. 벨기에 예술가인 마르셀 브로타에스의 화분, 의자 등으로 구성된 설치 작품 ‘Un Jardin d‘Hiver’(1974년)와 드리스 반 노튼의 2004년 패션쇼 공간 테마에서 영감을 얻었다.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전시 공간은 관객 체험에 집중하는 글린트의 특징에 맞춰 평범하게 구성했다. 열리는 전시에 맞춰 매번 그 모습이 달라진다. 개관 전시로 사카모토 류이치 특별전 ‘Ryuichi Sakamoto: Life, Life’를 개최해 주목받았다. 현재는 피나 바우쉬(바우슈)와 30여 년간 협업한 무대 미술가 페터 팝스트의 전시 ‘피나 바우쉬 작품을 위한 공간들’(10월 27일까지)이 열린다.

김범상 글린트 대표는 “과감한 표현을 위해 천고가 높고 시야가 탁 트이는 전시실을 만들고 싶었는데 오래된 건물의 제약이 여전히 아쉽긴 하다”고 털어놨다. 그럼에도 전시를 위해 밑그림을 그린 공간이 운이 좋아 저절로 모습을 갖추게 된 거라고 설명했다.

“전시를 보러 오는 사람들을 위한 기능을 추가하다 보니 지금의 모습이 됐습니다. 평소 좋아하던 분야와 호감 있던 사람들과의 협력이 자연스럽게 이뤄져 독립적 경쟁력을 갖춘 건축물이 된 건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