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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번째 시집 펴낸 최문자 시인 “불시에 남편 잃고 비로소 슬픔을 배워”

입력 | 2019-06-14 03:00:00


최문자 시인은 “이번 시집은 삶의 끝자락에서 고백할 것들을 길러냈다”고 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나는 자주 들켰다/나쁜 폐와 슬픈 아가미를/숨긴다는 건 뭔가요/스푼으로 나를 사라지도록 젓는 것/나는 풀어지지만 나는 줄어들지 않아 … 때대로 잘린 단면은 내가 부서진 곳이다’(‘그림자’)

12일 서울 종로구 청계천변에서 만난 시인이 가만히 시를 읽어 내려갔다. 최근 여덟 번째 시집 ‘우리가 훔친 것들이 만발한다’(민음사·사진)를 펴낸 최문자 시인(76). 40년 가까이 대학교수, 총장, 세 아이의 엄마로 질주하는 틈틈이 시를 써온 그는 2014년 불시에 남편을 잃고서야 “비로소 슬픔을 배웠다”고 했다.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감정을 모른 척하며 ‘급 고독’한 채로 견뎌왔어요. 지난 몇 년간 (남편에 대한) 죄책감과 상실감에 붙들려 가만히 지난 시간을 돌아보다가 깨달았지요. 슬픔을 잘 처리하지 않으면 독이 돼 나를 부러뜨린다는 걸요.”

‘용서는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 보려고/몇 번이나 집을 걸어 나갔다/저수지 옆길을 돌아 발자국이 끝나면/이렇게 걸어서 곧 용서받을 수 있을까 하고 더 오래 걸었다’(‘죄책감’)

지난 일곱 권의 시집에는 인생 고비마다 시인이 온몸으로 부대낀 희비극이 녹아 있다. 육아와 논문에 치여 이명이 윙윙대던 시절에 쓴 ‘귀 안에 슬픈 말 있네’, 동년배에 비해 홀로 뒤처진다는 분노를 담은 ‘나는 시선 밖의 일부이다’, 사회생활의 고난을 노래한 ‘그녀는 믿는 버릇이 있다’ 등이다. 우울, 결기, 독기를 노래해왔다. 이번 시에는 죄책감이 곳곳에 녹아 있다.

“육아와 일에 치여 뒷전 신세였던 남편에게 먼저 고백할까 하다가도 왜 내가 먼저 해야 하느냐는 생각에 전하지 못한 말들이 가슴을 후벼 팠어요. 이제는 확실히 말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이에게 먼저 고백해야 한다는 것을,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는 사실을요.”

시인은 시를 둘러싼 문단의 논쟁에 대한 생각도 건넸다. 그는 “서정시를 주로 쓰지만 이른바 난해시도 응원한다. 개운하게 읽혀야만 시의 자격을 갖는 건 아니다. 에너지와 방향을 선물해주는 전위적인 시를 배척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