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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원’ 내달 창립 20년… 탈북민 정착 교육의 세계

입력 | 2019-06-15 03:00:00

청년 졸업생, “영감” 노인 불렀다 봉변… 언어 적응 강화




탈북민들이 생활하고 있는 하나원 내 숙소(왼쪽 사진)와 예절 교육이 진행되는 하나원 교육관 내부 모습. 탈북민들은 예절 교육을 비롯해 한식 조리 수업, 컴퓨터 활용 교육 등을 받고 사회로 배출된다. 동아일보DB·통일부 제공

탈북민 정착 교육 시설인 ‘하나원’이 다음 달 8일로 창립 20주년을 맞는다.

1999년 경기 안성시에 ‘북한이탈주민정착지원사무소’라는 명칭으로 문을 연 하나원은 지금까지 3만 명 이상의 탈북민을 교육해 사회에 배출했다. 대다수 탈북민에게 하나원은 한국에서 첫발걸음을 뗀 ‘마음의 고향’으로 기억된다.

한국에 입국한 탈북민은 국정원 경찰청 등 관계기관의 합동신문을 거친 뒤 하나원으로 가서 12주간 문화적 이질감 해소, 심리 안정, 진로지도 상담 등 ‘사회적응교육’을 받는다. 이 기간에 정부는 탈북민의 가족관계를 등록하고, 집을 마련해 주는 등 이들의 사회 정착을 준비해 준다.

탈북민과 만들어가는 ‘작은 통일’의 입구에 선 하나원의 20년 역사는 순탄치만은 않았다. 수많은 갈등과 화해가 이곳에서 만들어졌다. 하나원의 시작과 현재를 조명해 본다.

○ 귀순자에서 북한이탈주민까지

하나원 설립은 김대중 정부 출범 초기 “한 해 수십 명 들어오는 탈북자도 돌보지 못하면서 무슨 통일을 운운하느냐”는 여론 속에 결정됐다. 하나원의 출범을 이해하려면 북한을 탈출한 사람들에 대한 정책이 어떻게 변했는지부터 알아야 한다. 반공을 국시로 삼고 있던 1960년대부터 1993년까지 북한을 탈출한 사람들은 국가유공자 지위를 부여받고 엄청난 금전적 보상을 받았다. 1980년대엔 “의사, 변호사 위에 귀순자가 있다”는 말까지 나왔을 정도다.

1990년대 접어들면서 이런 상황에 변화가 생긴다. 러시아 벌목공의 대규모 귀순이 시작되자 1993년 6월 ‘귀순북한동포보호법’이 제정되면서 탈북민은 생활능력이 결여된 생활보호대상자로 간주됐다. 주관 부처도 국가보훈처에서 보건복지부로 이관됐다. 경제적 지원이 급격하게 줄어들자 탈북민은 가난에 허덕였다.

김대중 정부는 1997년 ‘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지원에 관한 법률’을 만들고 탈북민에 대한 정착비와 주거지원비를 확대했다. 담당 부처도 보건복지부에서 통일부로 바뀌었다. 북한의 경제난으로 탈북민 수가 늘어남에 따라 이들에 대한 사회적응 교육 시설의 필요성이 제기돼 결국 하나원이 만들어졌다.

○ “영감, 고기 잘 잡힙니까?”

하나원 초기 매달 입소하는 탈북자는 많지 않았다. 1기 20명, 2기 9명, 3기 32명, 4기 41명, 5기 27명…. 2002년 23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한 기수가 100명이 넘었다.

하나원을 만든 뒤에도 주관 부서인 통일부는 초기에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당장 1기부터 사망 사고가 발생했다. 사회에 나가지 못하고 3개월 동안 하나원에 더 갇혀 있게 되자 탈북민들은 거칠어졌다. 이들을 다독이려고 공무원들은 수시로 함께 외박을 나갔다. 그런 가운데 밤에 저수지에 수영하러 나갔던 1기생 남성이 심장마비로 숨졌다. 총명하고 촉망받던 청년이었다.

게다가 탈북민 사이의 싸움과 연애 사건까지 끝없이 터졌다. 통일부는 이들을 졸업시킨 뒤인 2000년 1월에야 3기생을 받았다. 예정대로라면 3기는 1999년 9월에 입소했어야 했다. 고작 29명뿐인 1, 2기를 제대로 다루지 못해 다른 탈북민을 합동신문 기관에서 4개월을 더 기다리게 했던 것이다.

무엇부터 교육할지도 몰랐다. 이런 가운데 사회에 배출된 1, 2기 졸업생들의 사고 소식이 잇따랐다. 지방에 간 청년이 낚시하는 노인에게 북한에서 하던 버릇대로 생각 없이 “영감, 고기 잘 잡힙니까”라고 했다가 큰 봉변을 당한 일도 있었다. 새파란 청년에게서 영감이란 말을 들은 노인은 펄펄 뛰었다. 어느 곳에선 한국 여성과 결혼한 청년이 너무 버릇이 없다는 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장모가 한 달 내내 김치와 반찬을 냉장고에 넣어주다가 “더 부족한 것이 없느냐”고 물었는데 탈북민 사위가 “일없습니다”라고 대답한 게 화근이 됐다. ‘괜찮습니다’라는 뜻이었지만 이를 오해한 장모는 다니던 교회 목사를 찾아가 “내가 어떻게 해주었는데 탈북한 사위가 나를 무시한다”고 하소연했다.

이런 일들을 겪으며 초기 하나원은 탈북민에게 언어와 정착 교육에 초점을 맞췄다. 1999년 9월부터 2002년 10월까지 하나원 원장을 지낸 김중태 전 통일부 기조실장은 “우리 역시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탈북민에 대해 알아갔다”며 “환자가 그렇게 많을 줄도 몰랐다”고 말했다. 그는 “초기 교육생들의 옷차림이 이상해서 살펴보니 운동복 위에 또 옷을 껴입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내복을 입는 북한의 습관을 몰라 속옷과 겉옷만 지급했던 것이다. 김 전 원장은 “내복을 살 예산이 책정되지 않아 천주교 단체의 후원으로 내복을 급히 구했다”며 “초기 영락교회, 정동제일교회 같은 교계에서 많이 후원했다”고 기억했다.

○ “넌 하나원 몇 기니?”

대다수 탈북민은 서로 만나면 상대에게 “하나원 몇 기냐”고 인사처럼 묻는다. 하나원 기수는 탈북민에겐 대학교 학번과 마찬가지다. 매달 한 번씩 조사를 마친 탈북민이 하나원에 오면 순서대로 기수가 부여된다. 19일에 256기 교육생이 사회에 배출된다.

탈북민들이 기억하는 하나원에 대한 추억은 경기 안성 성남 시흥 양주시와 강원 화천군으로 각자 다르다. 2002년 8월까진 모든 탈북민이 안성시의 하나원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입국자가 늘어나자 통일부는 같은 해 9월부터 성남시 새마을운동중앙연수원 시설을 임차해 여성들을 따로 교육했다. 이때는 여성보다 남성 수가 많을 때였다. 이후 시설 포화와 임차 기간 만료 등의 이유로 하나원 분원은 시흥과 양주로 옮겨 다녔다. 2013년 화천군에 하나원 제2분원이 세워지고 남성 탈북민을 따로 교육하면서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2009년 2914명에 이르던 탈북민은 2012년 1502명이 입국하며 절반으로 줄었다. 이후부터 계속 줄어 1년 평균 1200명 안팎 수준에 머물고 있다. 김정은이 권력을 잡은 뒤 탈북에 대한 단속이 매우 엄격해진 것과 무관치 않다.

탈북민 수가 줄어도 통일부의 탈북민 지원 업무와 예산은 크게 줄지 않았다. 통일부 공무원 500여 명 중 20%에 육박하는 100여 명이 하나원 업무에 종사한다. 제2분원만 해도 고작 수십 명의 남성 탈북민 교육을 위해 30여 명의 통일부 직원이 일한다. 반면 안성 하나원엔 빈방이 많다.

○ “졸리고, 지루해요.”

2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하나원이 갈 길은 여전히 멀다. 12주의 하나원 교육 기간과 교육의 질 등은 과거나 지금이나 늘 논쟁거리다. 하나원이 탈북민의 정착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역시 의견이 엇갈린다.

20년이 지나도록 바뀌지 않는 일부 하나원 직원들의 불친절하고 고압적인 태도도 시급히 개선해야 할 문제다. 탈북민이 한국 사회에서 처음 만나는 공무원이기 때문이다. 전문성 부족도 풀어야 할 숙제다. 하나원은 20년 동안 원장만 16명이 바뀌었다. 이 중 3년 정도 근무한 3명을 제외하면 나머지 13명 원장의 재직 기간은 1년도 안 된다. 직원도 전문성을 따져 뽑지 않고 통일부 직원들이 돌아가며 순환근무를 한다. 탈북민에 대한 제대로 된 교육 훈련을 고민하기보다는 본부로 복직할 때까지 무난하게 시간이나 때우려는 경향이 적지 않다. 김 전 원장은 “하나원은 가장 공무원 같지 않은 공무원들이 있어야 하는 곳이며 직원들은 자신의 행동이 탈북민에게 얼마나 영향을 주는지 늘 명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행착오를 최소화하려면 하나원의 20년 역사 속에서 얻은 교훈이 전해져야 하는데 이런 과정이 누락된 채 매년 담당 공무원이 바뀌면서 똑같은 실수가 반복되는 일도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다.

하나원을 졸업한 탈북민이 가장 문제점으로 꼽는 것은 교육이다. 다양한 연령과 성별, 경력을 가진 탈북민이 모이다 보니 각자의 수준에 맞는 교육과정은 애초에 엄두를 내지 못한다. 무엇보다 지루하다는 불만이 제일 많다. 강사의 수준과 강의 내용도 늘 논란거리다.

19일 하나원을 졸업하는 한 탈북여성이 최근 지인에게 털어놓은 하소연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언니, 나 무서워서 사회에 못 나가겠어. 나가면 사기꾼들이 득실거린다고 귀가 아프도록 들었는데 앞으로 어떻게 살지 막막해.”

▼“식단-의료 훌륭… 개인 맞춤형 진로 지도 등 현실적 교육을”▼

거쳐간 탈북민들이 되돌아본 하나원 생활


탈북민들은 하나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무작위로 남녀 각각 5명을 선택해 좋았던 점과 싫었던 점을 두 가지씩 물었다. 한국 사회를 많이 알수록 더 객관적 평가를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해 오래전 졸업한 탈북민 위주로 선정했다. 괄호 안에 성별과 하나원을 졸업한 시기를 밝혔다.

○ “나는 이래서 하나원이 좋았다”

“있을 땐 몰랐는데 정작 사회에 나오니 다른 사람들과 함께 지낸 그 시절이 그립고 즐거운 추억으로 기억된다.”(여·2012년)

“식단도 좋았고, 의료 서비스도 좋았다. 무엇보다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어 좋았다. 운동도 마음껏 했다.”(남·2006년)

“심성수련 시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약육강식의 사회인 줄만 알았는데, 따뜻한 마음도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다.”(여·2002년)

“돌아보니 근심걱정 없이 생활할 수 있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었다.”(남·2006년)

“전반적인 기억이 좋다. 의료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고, 음식도 맛있었다.”(여·2012년)

“탈북 과정에서 지친 몸과 마음을 아무 생각 없이 편히 다스릴 수 있어서 기뻤다. 먼저 사회에 나간 탈북민이 와서 자기 이야기를 들려준 시간이 좋았다.”(남·2004년)

“드디어 안전하게 보호받는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안온했다.”(여·2002년)

“마음이 편했고, 현장학습을 나갈 때마다 너무 기뻤던 것이 기억난다.”(남·2016년)

“지금 생각해 보면 한국 생활 중에서 하나원이 제일 좋았다. 의식주를 다 책임져 주고 골치 아픈 일도 없고, 쉬는 기분이었다. 다시 거기서 생활하다 오고 싶다.”(여·2008년)

“시설이 깨끗했고, 무엇보다 체육시설이 잘 갖춰져 있어서 좋았다. 배고프지 않았던 것도 좋았다.”(남·2016년)

○ “나는 이래서 하나원이 싫었다”

“배운 것이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특히 탈북민을 멀리하고 아무 사람이나 믿지 말라고 계속 교육받아서 한동안 주변을 불신하게 했다.”(여·2012년)

“직업교육을 일률적으로 하지 말고 개인별 맞춤형 진로 지도 시스템이 있으면 좋겠다. 외부활동이 너무 적은데, 자주 한국 사회를 경험했으면 좋겠다.”(남·2006년)

“특별히 지적할 점은 생각나지 않지만 교육이 약간 아쉬웠다.”(여·2002년)

“교육 내용과 수준이 맞지 않아 지루했다. 전문성을 갖춘 직원들이 부족하다.”(남·2006년)

“수업이 너무 많은데 무슨 소리인지 몰라 졸렸고 기억에 남는 것도 없다.”(여·2012년)

“하나원 직원들이 너무 거들먹거려 기분이 나빴다.”(남·2004년)

“가족 해체를 겪으며 한국에 온 탈북민 가족을 하나원에서도 몇 달 동안 갈라놓아 이산가족을 만든다. 탈북민 대다수가 도시에서 사는데 산골에 가둬놓고 비현실적 교육을 한다. 하나원을 없애야 한다고 생각한다.”(여·2002년)

“절실히 필요하지 않은 교육을 정리하고 심리상담을 강화해야 한다.”(남·2016년)

“나오니 좋은 것을 알겠지만, 안에 있을 때는 지루하고 하루라도 빨리 사회에 나가고 싶었다. 나와 보니 정착은 책이 아니라 몸으로 부딪치며 배우는 과정이었다.”(여·2008년)

“교육이 형식에 그치는 것 같다. 음식이 단조로워 질렸다. 교육생 중에 난폭한 사람이 석 달 내내 분위기를 망쳐도 감싸기만 하고 대책이 없다. 큰 사건 없이 달래서 졸업만 시키면 그 후엔 자기 일이 아니라서 그러는 것 같다.”(남·2016년)

주성하 zsh75@donga.com·이지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