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놈들에게… 살아남는 법’의 저자 이회림 형사
삽시간에 내동댕이쳐진 논설위원 가장 효과적인 공격을 묻자 그녀는 “낭심 차기”라며 “한번 제대로 차 드릴까요”라고 물었다. 기자 정신이 약간 부족해 다리 걸어 넘어뜨리기로 대신했다. 이 조그만 여자한테 설마 넘어지랴 싶었는데 간단히 내팽개쳐진 것은 물론이고 머리를 부딪친 충격으로 별이 보였다. 인터뷰와 호신술 시범은 12일 경북 경주 한국체대유도관에서 진행됐다. 매트 위가 아니라 아스팔트 위였다면 입원 수준의 부상을 입었을지도 모른다. 경주=박경모 기자 momo@donga.com·장소 제공 경주 한국체대유도관
이진구 논설위원
―신림동 사건 CCTV 영상은 충격 그 자체였는데 흔한 일이라니….
“암수범죄(暗數犯罪)나 피해자가 사건화를 거부하는 것까지 포함하면 성범죄 통계는 빙산의 일각이다. 신림동 사건도 신고하지 않았다면 사건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게 된다.” (성폭행은 친고죄가 아닌데, 경찰이 알면서도 수사를 못 한다니?) “법적으로는 할 수 있지만 피해 여성이 울며불며 하지 말아 달라는데 무시하기는 어렵다. 가족들이 받을 충격 때문에 그러기도 하고…. 그런 경우가 너무 많다.”
암수범죄는 범죄가 발생했으나 경찰이 모르거나, 알아도 용의자의 신원 파악 등이 안 돼 통계에 집계되지 않는 범죄다. 2017년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강간 강제추행 등 성범죄는 모두 2만4100건이며 이 중 강간은 5223건이다. 이보다 훨씬 많은 범죄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 빙산이 도대체 얼마나 큰 건가.
지난달 28일 서울 신림동 사건 폐쇄회로(CC)TV 장면.
“원룸에서 함께 살던 두 여대생이 집에 침입한 한 남성에게 차례로 강간당한 사건이 있었다. 신고는 안 됐는데 다른 곳에서 잡힌 범인의 여죄를 추궁하다 알게 됐다. 피해자들에게 확인하니까 ‘맞다’고 하더라. 경찰서에 와서 진술해 달라고 했더니 ‘잊고 살고 싶다’며 안 나왔다. 이 때문에 두 여대생 사건은 죄에 포함되지 않았다. 이게 현실이다.”
―신고가 적으면 실제 저지른 범죄만큼 처벌을 할 수가 없지 않나.
“앞서 말한 40여 명을 건드린 범인은 5년을 살았다.” (40여 명에 고작 5년?) “한 명만 신고해 법정에서 진술했으니까…. 수사보고서에는 40여 명이 다 적혀 있지만 다른 피해자들이 나서지 않으니 판사도 어쩔 수 없었을 거다. 40여 명이 모두 신고했으면 5년만 나올 수가 있겠나. 법정에서 그놈 표정을 봤는데 엄청 반성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라. 가증스럽게…. 그놈이 출소 후 문자를 보냈다. 잘 지내냐고….” (연락처를 저장한 것도 아닐 텐데 그놈인지 어떻게 알았나) “밑에 자기 이름을 적었으니까….”
“어두운 쪽 사람들을 많이 접하다 보니 이상한 문자나 전화는 자주 온다. ‘여보세요’ 하면 말없이 가만히 있다가 툭 끊는데…. 누군지는 모른다. 사건 관련자들일 수도 있고…. 그래서 연말쯤 이름과 전화번호를 바꿀 생각이다. 받아 놓은 이름이 있다.”
―책까지 썼는데 얼굴을 공개하지 않고 필명으로 활동하는 이유가 그 때문인가.
“워낙 다양하고 이상한 범죄자들을 많이 보니까…. 성범죄를 다루는 여경이라는 점에 자극돼 범행 대상으로 삼을 범죄자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불상사에서 가족들을 보호하고도 싶고, 얼굴이 알려지면 범인 검거에 지장도 있고. 죄송한데 양해해 줬으면 한다.”
―많은 여성들이 성폭행을 당할 때 제대로 저항을 못 한다고 하던데….
―필사적으로 저항하라고 했는데, 그러다 더 큰 피해를 입는 것 아닌가.
“가해자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가만히 있는 여성을 자기 손에 놓고 마음대로 하는 게 굉장히 짜릿하다는 것이다. 물론 납치돼 결박됐거나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는 차분하게 기회를 노릴 필요가 있다. 그런 경우가 아닌 일반적인 장소에서는 깨물기라도 하면서 저항해야 도망치거나 살 수 있다. 가만히 있으면 죽는다고 생각해야 한다.”
―태권도나 합기도를 배운다고 여성이 성폭행범을 제압할 수 있나.
“잠깐 배운다고 그게 되겠나. 무술을 숙달해서 이기라는 게 아니라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일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잡혀온 가해자들이 ‘못된 애들은 건드리고 싶은 마음이 없어진다’는 말을 자주 한다.” (못된 애들이라니?) “손을 대려는데 저항하고 거부하는 여성들을 그렇게 표현한다. 얼마 전 한 지인이 겪은 일인데, 버스정류장에서 취한 남성이 옆에 앉아 슬쩍 만지려고 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더니 ‘아이, 씨’ 이러면서 일어나 멀쩡하게 갔다는 것이다. 무술이나 운동을 하면 왜 이걸 하는지 계속 생각하게 된다. 그 생각이 위험한 순간이 왔을 때 몸이 굳어지는 속에서도 저항해야 한다는 생각을 낳게 하는 것이다.
―홍익대 누드모델 몰래카메라 사건의 경우 성대결 양상까지 벌어졌다.
“피해자가 남자라 경찰이 빨리 잡아줬고, 가해자가 여성이라 구속됐다는 건데…. 그 사건은 용의자가 교수와 학생들, 모델 당사자로 제한된, 아주 빨리 잡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늦게 잡으면 오히려 그게 더 문제인데….”
―수사하는 입장에서 애로점이 뭔가.
“경찰 입장에서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순찰 경찰관에게 거의 어벤저스를 기대한다. 스웨덴 여행 중 친구가 카페에서 가방을 도난당한 적이 있다. 그랬더니 경찰이 아무리 빨라도 1시간 뒤에나 온다는 것이다.” (카페 주인이 그러던가?) “아니, 112에서. 스웨덴도 우리처럼 112다. 바로 신고 접수도 안 되고 연결에 연결을 해 간신히 통화가 됐는데 바빠서 그런 범죄는 빨라야 1시간 뒤에 도착한다더라. CCTV를 빨리 확인하고 싶으면 가까운 경찰서로 직접 가라며…. 나도 혼자 살아서 국내에서 신고를 많이 하는 편인데, 우리처럼 잘하는 곳은 드물다.”
―신림동 사건에서는 경찰의 안이한 대응이 문제가 되지 않았나(출동한 경찰은 피해자가 사는 건물 6층은 확인하지 않고 철수했다).
“피해자도 만나고 좀 더 철저히 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변명의 여지는 없지만 신고 시간이 오전 6시 반쯤이던데… 그 시간이 밤을 새우고 퇴근을 두어 시간 남긴, 제일 피곤한 시간이다. 그러다 보니 신고자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도 아니라 좀 방심한 게 아닌가 싶다. 안타까운 건 그런 사건이 숱하게 벌어지는데도 시스템은 변한 게 없다는 점이다.”
―변한 게 없다니….
“프로파일링(범죄유형분석법)이라고도 하지만… 그런 거창한 말도 필요 없이 신림동은 대학생들이 많고 집들이 밀집한 지역 특성이 분명한 곳이다. 성범죄도 신림동 사건처럼 남자가 여성을 뒤따라가다가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지역 특성에 맞는 범죄 예방 모델이 적용됐어야 하는데 그런 게 전혀 없다. 나도 혼자 살아봤지만 밤에 철커덕 철커덕 하면서 문손잡이 흔드는 소리를 들은 게 한두 번이 아니다. 2007년 이전에 만든 전자키(디지털 도어록)는 건전지 두 개로 전기충격을 주면 잠금이 풀린다. 내가 직접 봤다. 얼마나 놀랐는지. 혼자 사는 여성들은 꼭 확인해 바꿔야 한다.”
―피해자 주변 사람들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게 있나.
“가족이나 지인, 경찰 등 관계자들은 ‘왜 기억 못 하냐’ ‘시간 장소를 특정해야 하는데…’ 이런 말을 절대로 하면 안 된다. 진술이 정확해야 범인을 잡을 수 있으니 안타까워서 하는 말이지만, 피해 여성들은 대부분 그 순간 얼어붙기 때문에 100% 정확하게 기억할 수가 없다. 그런 말이 피해자를 더 위축시켜 진술을 흔들리게 한다. 진술이 흔들리면 수사가 제대로 되기 어렵다. 피해 현장에 같이 있던 사람들도 ‘잘 생각해 봐. 이거 아니었어?’ 이런 말을 해선 안 된다. 피해자들은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기 때문에 빨리 잊고만 싶어 한다. 여기에 자기 진술도 확신이 없고, 수사 절차도 복잡하고 그러다 보면 중간에 포기한다. 진술 도중 ‘너무 힘들다. 신고 안 한 걸로 해 달라’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