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8년 정유재란으로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 도공들은 살기 좋은 성내로 옮길 것이 허락되자 이런 말로 거절했다. 이들이 정착한 규슈 나에시로가와(현 미야마)는 언덕 너머로 한반도를 향한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70여 명이 대대손손 한복을 입고 모국어를 사용하며 살았다. 당대의 지식인이자 작가인 시바 료타로가 소설 ‘고향을 어찌 잊으리’(1969년)에서 이런 모습을 그려냈다. 16일 향년 93세로 별세한 심수관 옹은 이때 정착한 심당길의 14대손이다.
▷2년 전 찾아본 그는 가업을 15대에게 물려주고 애견과 함께 한가롭게 집과 요(窯)를 오갔다. 명문대를 나온 그도, 아버지 13대도, 또 그 아버지인 12대도 궁극의 목표는 가업 계승이었다. 혈기왕성한 소년 시절 14대가 “사관학교에 가겠다”고 하자 13대는 마당의 나무들을 가리켰다. “저들은 스스로 원해 여기 심겨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심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목숨이 다할 때까지 노력한다. 우리도 저 나무와 같다.” 14대는 1998년 동아일보 일민미술관에서 심수관가(家) ‘400년 만의 귀향전’을 열었고 고향인 전북 남원에서 불씨를 채취해 미야마에 옮겼다. 아버지 13대의 유언을 34년 만에 이뤄낸 거였다.
▷그가 1965년 첫 방한 때 서울대에서 한 강연 얘기가 새롭다. 당시 대학은 한일 수교 반대운동으로 들끓었다. 계란 맞을 각오로 말했다. “당신들이 36년의 한을 말한다면 나는 360년의 한을 말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미래로 나아갈 수 없는 것 아닌가.” 강연장은 일순 고요해졌고 곧이어 눈물바다가 됐다고 한다. 그로부터 다시 50여 년, 과거사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더 쿨해져 있을까.
▷2년 전, 그는 말끝마다 “다시 한국에 가보고 싶다”며 눈을 가늘게 뜨다가도 “나이 때문에 어려울 것”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특히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청명한 날씨를 그리워했다. 지금쯤 ‘천 개의 바람’처럼 자유로워진 그의 혼백이 바다 건너 고향땅을 돌아보고 있기를 빌어본다.
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