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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아내 해친 치매노인 구금 대신 치료”… 병원 못구해 발동동

입력 | 2019-06-22 03:00:00

[위클리 리포트]국내 첫 ‘치료司法’ 실험 성공할까




“제가 사람을 아주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지난해 1월 24일 오후 A 씨(77·여)는 112에 직접 전화를 걸어 이렇게 신고했다. 56년간 부부의 연을 맺고 함께 살아온 남편을 흉기로 찔러 살해한 직후였다. A 씨는 치매 환자였다. 환각과 망상에 시달렸고, 충동이 조절되지 않았다.


○ 치매 환자 75만 명, ‘치매살인’도 늘어

A 씨는 6, 7년 전부터 뇌경색으로 거동이 불편한 남편을 간호했다. 간병인의 도움 없이 홀로 남편을 돌봤다. 식사 등 자신보다 덩치가 큰 남편의 수발을 들었다. 변비를 앓는 남편을 매일 관장해주는 일도 맡았다. 남편은 그런 A 씨에게 폭행을 일삼았다. 성적 모욕감을 주는 말과 함께 지팡이로 A 씨를 때리기도 했다.

2016년 1월부터 치매 초기 증세를 보였던 A 씨는 갈수록 증세가 악화됐다. 지난해 1월 21일 경찰에 아들이 죽었다는 허위 신고를 했고, 이틀 뒤엔 별다른 이유 없이 주차된 차량을 발로 차고, 길가의 화분을 던져 경찰 조사를 받았다. 지난해 1월 A 씨는 남편이 지팡이로 목을 찌르자 화가 나 다용도실에 있던 흉기를 꺼내 들고, 남편에게 갔다.

1심 재판부는 A 씨에게 징역 3년형을 선고하면서 A4 용지 2장에 걸쳐 양형 이유를 설명했다. 재판부는 “수년 전부터 치매 증상이 발현됐음에도 적절한 치료나 보호를 받지 못한 채 증상이 악화됐다. 향후 정신적인 질환에 대한 집중적인 치료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앞서 법원은 “이 사건 범행은 알츠하이머 치매로 인한 피고인의 인지기능 저하와 이에 동반된 현실 검증력 저하, 환각, 망상, 충동성 등의 병적 상태에 기인해 일어난 것으로 추정된다”는 내용의 A 씨에 대한 의료진의 정신감정 소견을 받았다.

A 씨는 지난해 11월 풀려났다. 항소심 재판부가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고령에다가 치매 등의 질병으로 수감 생활에 어려움이 많은 것으로 판단된다”고 양형 이유를 밝혔다.


○ 천차만별 판결… 징역, 집행유예, 치료보호처분


지난해 기준 국내 치매 환자는 75만 명에 이른다. 치매 노인을 돌보다 이른바 ‘간병 살인’을 저지르는 사건이 끊이질 않지만 거꾸로 제대로 관리 받지 못한 치매 노인이 자신을 돌보는 가족을 살해하는 사건이 늘고 있다.

60대 치매 노인이 아내를 살해한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하자 최근 항소심 재판부가 이례적으로 치료를 위한 보석 방침을 밝힌 사실(본보 6월 20일자 A10면 참조)이 알려지면서 살인을 저지른 치매 환자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치매 증세를 보인 피고인이 가족을 숨지게 한 사건의 법원 판결문에 따르면 치매 살인자들의 범행과 재판 과정에는 크게 다섯 가지의 공통점이 있었다. 첫째, 피고인이 오랫동안 치매를 앓아온 고령자다. 둘째, 범행 이전에 자살을 시도하거나 주변 물건들을 파손하는 등 이상 행동을 보였다. 셋째, 자신을 오랫동안 보살핀 가족을 우발적으로 살해했다. 넷째, 스스로 이웃이나 경찰·소방 신고를 해 범행을 알렸다. 마지막으로, 범행에 큰 상처를 입은 자녀들이 재판 과정에서 오히려 선처를 요구했다.

최근 재판부로부터 첫 ‘치료사법’ 대상자가 된 B 씨(67)도 수년간 치매를 앓아왔다. 또 범행 이전 폭력성이 커지는 등 이상 행동을 보였다. B 씨의 자녀들은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아버지를 용서하셨을 것”이라며 재판부에 선처를 호소했다.

알코올성 치매와 불면증을 앓던 C 씨(70)는 아내를 살해하기 전 누군가와 대화하듯 허공에 대고 말하는 이상 증세를 보였다. 치매 발병 이전에는 평소 온화하고 여린 성품으로 원만한 결혼 생활을 해왔다고 자녀들은 증언했다. C 씨 자녀들은 C 씨를 제대로 모시지 못한 자신들의 과오를 자책하며 선처를 요구했다. “엄살 부리지 말라”고 했다는 이유로 아내를 살해한 D 씨(85)도 15년 전부터 알츠하이머병 치료제를 꾸준히 복용했지만 치매 증상이 심각했다.


○ 1심 최대 징역 10년, 최소 징역 3년


“피해자의 죽음으로 누구보다 가장 큰 괴로움을 겪고 있는 사람은 피고인 자신이다. 원심 판결을 파기한다. 피고인을 징역 3년에 처한다.”

지난해 10월 서울고법 형사합의3부는 자신의 아내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E 씨(79)에게 이렇게 선고했다. E 씨는 치매 장기요양 4등급으로 치료를 받고 있었다. 오랫동안 인지능력과 판단력 저하, 충동성, 공격성 등이 수반되는 증상을 겪었다. 지난해 2월 E 씨는 자신의 집 안방에서 아내에게 치매 약을 달라고 했지만 아내가 “이미 약을 먹었다”며 거절했다. 순간적으로 격분한 E 씨는 아내의 목을 졸라 살해했다.

E 씨 사건을 맡은 1심 재판부는 양형 범위가 징역 2년 6개월∼22년 6개월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심신 미약 상태였던 점과 피해자이나 가해자의 가족인 자녀들이 E 씨에 대한 선처를 호소하는 점 등을 참작해서 징역 4년을 선고했다.

가족을 숨지게 한 치매 노인 A∼E 씨는 1심에서 최대 징역 10년, 최소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2심에서 모두 감형 받았다. 남편을 죽인 A 씨 형량은 징역 3년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으로 줄었다. 15년간 치매를 앓다 아내를 살해한 D 씨는 1심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지만 2심에서 징역 6년에 치료감호 처분을 받았다.


○ 첫 치료사법… 병원 못 구하면 무산될 수도

B 씨의 1심 재판부인 서울서부지법 형사합의11부(부장판사 조병구)도 B 씨에게 실형을 선고하기까지 많은 고민을 했다. B 씨의 치료를 강력히 검토했지만 치료감호소에서 “치매 환자는 치료 감호로 개선이 어렵다”는 취지의 답을 받았다. 1심 재판부는 “향후 정신 질환에 대한 집중적인 치료가 필요하다고 보인다. 질병으로 장기간 수감생활을 감당하기 어려워 보이는 점 등을 참작했다”며 B 씨에게 징역 5년을 선고했다.

B 씨와 검찰 측이 모두 항소하면서 사건은 서울고법 형사합의1부(부장판사 정준영)로 넘겨졌다. 정 부장판사도 B 씨 사건 기록을 살피다 고민에 빠졌다. 자신이 아내를 죽이고도 아내가 숨진 사실조차 모르는 B 씨를 감옥에 보내는 게 맞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전통적 사법 개념을 넘어 국내에는 아직 도입되지 않은 치료사법을 시도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이 사건은 검찰과 피고인의 대립적 구도가 아니기 때문에 B 씨의 치료를 위해서 변호인, 검찰과 피고인의 가족이 서로 협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 부장판사는 19일 B 씨의 재판에서 B 씨의 자녀들을 증인석에 앉히고 “피고인이 중증 치매 환자이니 수감 생활보다 당장 입원 치료가 필요할 것 같다”고 말했다. 정 부장판사는 병원이 정해지면 입원 치료를 조건으로 보석 보증금이 없는 직권 보석 허가를 하겠다고 밝혔다. B 씨를 일정 기간 치료한 뒤 최종 판결을 하겠다는 것이다.

정 부장판사는 “시범적으로 치료법원 개념으로 진행하고자 한다”며 “우리나라는 치료법원이 없으니 형사소송법 절차를 활용해 그 한도 내에서 하겠다”고 설명했다. 치료법원은 정신질환 범죄인에게 구금 대신 치료를 제공하는 법원이다. 정신질환 범죄인의 치료 과정을 법원이 사법적으로 통제해 재범을 방지하도록 하는 ‘치료사법’ 이념을 기본으로 한다.

미국은 치료법원인 정신건강법원을 대부분의 주에서 운영하고 있다. 판사와 검사, 변호인, 치료 전문가들이 한 팀을 이루어 피고인의 치료 방법을 마련한다. 피고인이 치료 과정을 제대로 이수하면 검찰이 불기소 처분을 내리거나, 법원이 형을 감경해준다.

재판부와 B 씨 자녀의 숙제는 아직 남아있다. 현실적으로 B 씨가 입원 치료할 병원을 구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의 치료법원처럼 법원과 병원이 연계돼 있지 않은 상황에서 살인을 저지른 B 씨를 치료할 시설을 찾는 건 하늘의 별따기다. 미국의 정신건강법원은 많은 경우 100곳 이상의 치료 기관에 피고인의 치료를 위탁하고 있다. B 씨의 가족이 치료 시설을 구하지 못하면 재판부의 치료사법 시도도 무산될 가능성이 크다.


▼ 치매 요양보호 현장선 “전문인력 처우 개선부터” ▼

만 65세 이상 노인 10명중 1명꼴 치매
정부 “전문 요양보호 인력 2022년까지 10만8000명 양성”


만 65세 이상이 총인구의 14%를 넘는 ‘고령사회’에 도달한 한국은 더 이상 치매에서 자유로운 국가가 아니다. 21일 중앙치매센터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치매 환자(추정치)는 75만488명에 이른다. 만 65세 이상 노인(약 739만 명) 10명 중 1명꼴로 치매를 앓고 있는 셈이다. 치매 인구는 2024년 100만 명이 넘고, 2039년에는 200만 명을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평균 수명이 길어지면서 노년에 치매로 고생할 확률도 덩달아 높아졌다. 정부는 총 치매 환자 중 80세 이상 비율을 약 61%로 추산한다. 지난해 기준 80세 이상 인구 164만4089명의 28%(46만여 명)가 치매 환자라는 얘기다.

김기웅 중앙치매센터장은 “결혼한 성인의 경우 양가 부모 4명 중 한 명은 치매에 걸릴 확률이 높다는 의미”라며 “한국인의 상당수는 노년에 치매를 겪거나 치매 환자를 돌봐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다”고 말했다.

치료와 돌봄이 동시에 필요한 치매는 가계에도 큰 부담이다. 지난해 치매 환자 1명당 평균 진료비는 약 344만 원으로 나타났다. 정부가 환자 1명을 돌보는 데 지원하는 비용은 2074만 원에 이른다. 중앙치매센터는 치매 인구가 급증하면서 이들을 돌보는 사회적 비용이 2050년 약 78조 원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문재인 정부는 ‘치매국가책임제’를 통해 치매 가족의 부담을 지속적으로 줄여나가고 있다. 치매 환자의 장기요양보험 혜택을 확대했고, 자기공명영상(MRI) 촬영 등 건강보험 적용 범위를 넓혀 환자 부담을 줄였다. 모든 기초자치단체에 치매안심센터를 설치해 치매 검사 등 환자 관리도 강화할 계획이다.

이를 두고 정부의 치매 지원 정책이 치매 환자의 의료비 부담을 낮추는 단기 처방에만 치우친다는 지적도 있다. 의료진과 요양보호사 등 치매 돌봄 인력을 양성하고 처우를 개선하는 데 소홀하다는 것이다. 정부는 2022년까지 총 10만8000명의 치매 전문 요양 보호 인력을 양성할 계획이지만, 현장에서는 “처우 개선 없이는 현재 인력을 유지하기도 어렵다”는 볼멘소리가 적지 않다.

고대안암병원 신경과 박건우 교수(대한치매학회 이사)는 “치매 환자가 늘어나는 만큼 의료진과 요양 인력이 보충되지 않으면 돌봄 서비스의 하향 평준화가 불가피하다”고 지적했다. 대한신경과의사회에 따르면 새로 배정되는 신경과 전공의 정원은 2015년 93명에서 지난해 82명으로 오히려 줄었다.

치매 환자가 곧 700만 명을 넘어설 것으로 보이는 일본의 사례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일본은 지난달 “2025년까지 70대 인구의 치매 환자 비율을 6% 낮추겠다”는 구체적인 목표를 담은 치매 종합대책을 내놓았다. 노인의 사회적 교류를 늘리고 스포츠 교실을 활성화하는 등 치매 치료보다 예방에 초점을 맞추겠다는 것이다. 일본은 이미 치매 친화 마을을 조성하고 치매 카페를 운영해 지역사회에서 치매 환자들이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치매 예방과 치료를 위한 투자를 늘려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기웅 센터장은 “세계보건기구(WHO)는 치매 예산의 최소 1%를 치매 예방과 치료를 위한 연구개발(R&D)에 투자하도록 권고하고 있다”며 “치매 예산 약 14조 원의 0.3% 수준에 불과한 R&D 투자 비율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예지 yeji@donga.com·이호재·박성민 기자 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