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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명의 인생 영화]희망이라는 재능

입력 | 2019-06-22 03:00:00

<22> 빌리 엘리어트




심재명 영화사 명필름 대표

최근 엘턴 존의 삶을 다룬 음악 영화 ‘로켓맨’을 보다가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엘턴 존의 평생 친구이자 그의 명곡들의 가사를 쓴 버니 토핀 역의 제이미 벨이다. 10대의 나이에 영화 ‘빌리 엘리어트’ 주인공 역으로 데뷔해 전 세계를 놀라게 한 배우 아니던가. 20년 전 겨울, 지금은 사라진 종로2가의 극장에서 이 낯선 소년의 얼굴을 보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열한 살 소년 빌리는 역사상 가장 긴 파업이 진행되고 있는 1980년대 영국 북부 광산촌 더럼에서 엄마를 여의고 광부 아버지와 형, 그리고 치매를 앓고 있는 할머니와 살고 있다. 마거릿 대처 총리가 석탄산업 민영화 정책을 강행하는 것에 노조는 장기 파업으로 맞서고 빌리의 아버지 재키와 형 토니도 이 싸움에 함께한다. 남자아이들은 복싱을 배우고 여자아이들은 발레를 하는 마을, 매일 가는 체육관에서 우연히 발레 수업을 보게 된 빌리는 매일 배우는 복싱 대신 토슈즈를 신고 춤추는 발레에 사로잡힌다. 그의 재능을 발견한 발레 교사 윌킨슨 부인은 아버지 몰래 빌리에게 춤을 가르치고 “남자는 레슬링이나 복싱을 하는 거고 발레는 게이나 하는 것”이라 믿는 무뚝뚝한 아버지를 설득한다. 촌뜨기 아버지와 아들은 로열발레학교의 아름다운 위용에 주눅 들지만, 빌리는 “춤을 출 때 어떤 생각이 드냐”는 심사위원 선생들 앞에서 처음으로 더듬거리며 말한다. “내 몸 자체가 변하는 기분이에요. 마치 몸속에 불이라도 치솟는 느낌이에요….”

빌리 엘리어트는 불우한 환경을 딛고 천재적 재능을 키워 결국에는 꿈을 이룬다는 성공 스토리인가. 이 영화는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빌리가 합격 통보를 받은 날 아버지는 기쁨에 겨워 동료들에게 달려가지만 동시에 광부들의 파업은 실패로 끝났다는 소식을 듣는다. 빌리가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 드디어 런던행 버스를 타고 떠나는 장면과 아버지와 형이 다시 어두운 갱도 속으로 내려가는 모습이 교차된다. 스티븐 돌드리 감독은 광산 엘리베이터가 갱도를 향해 수직으로 하강하는 모습과 빌리가 자신의 꿈을 위해 새로운 곳으로 향하는 모습을 평행 편집하면서 이 영화가 마냥 꿈을 찬양하고 희망을 가지라는 이야기가 아님을 역설한다.

수년이 흐른 후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아버지와 형은 빌리의 ‘백조의 호수’를 보러 런던에 간다. 자꾸 뒤처지는 늙은 아버지를 형은 재촉하고, 객석 옆에는 빌리의 오랜 게이 친구 마이클이 그의 애인과 함께 와 있다. 영화 역사에 남을 명장면, 빌리의 마지막 도약에서 우리는 누군가의 놀라운 재능이 삶을 위로하는 순간을 목도하게 된다. 그들 앞에 놓인 삶의 숙제에 충실하고 솔직했으므로 위로받고 존중받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이 영화는 도약의 이미지로 완성한다. 영화 빌리 엘리어트는 이후 감독 스티븐 돌드리, 매슈 본, 그리고 엘턴 존에 의해 세계적인 뮤지컬로 거듭났다. 그때의 인연이었을 제이미 벨을 20년이 지나 다른 영화로 다시 만나게 된 감회로 이 글을 썼다.
 
심재명 영화사 명필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