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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머릿속 괴물이 나의 숨통을 조여왔다”

입력 | 2019-06-26 03:00:00

[홍은심 기자의 낯선 바람]공황장애




‘30분만 견디면 된다.’

이학윤 씨(33)는 손에 잡히는 대로 펜과 종이를 집어 들고 펜촉으로 종이를 찢기 시작했다.

이 씨는 지독한 공황장애를 앓고 있다. 한참을 종이 찢기에 집중하다 보면 자신을 삼켜버릴 것만 같던 고통도 어느덧 잦아든다.

이 씨는 발작이 시작되면 그림을 그린다. 최근 이 그림들을 모은 ‘판의 시간’을 독립 출판했다. 판의 시간은 공황(panic)의 어원인 그리스 신화의 신, ‘판(pan)’에서 가져왔다. ‘공황 발작을 겪는 시간’을 의미한다.

2008년. 자주 지나던 복도에서였다. 갑자기 손끝이 굳어왔다. 그 순간 무언가가 온몸을 감싸고 숨통을 조여 왔다. 평소 들리지 않던 주변의 소리가 심장이 터질 듯 크게 들렸고 표현할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위험했다.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 하지만 마음과 달리 숨은 가빠오고 몸도 제대로 가눌 수가 없었다. 발작이었다. 그렇게 형체 없는 괴물이 그에게 왔다.

이 씨가 ‘판의 시간’에 실린 그림 중에 가장 맘에 드는 작품이라고 했다. 짓누르는 억압을 이겨내고 자신을 표현하는 모습이 좋다고 한다.

이 씨는 비슷한 경험을 그 뒤로도 몇 번을 겪고 한참 후인 5년 전 서울대병원에서 처음 공황장애 진단을 받았다. 그전까지는 대부분 우울증 치료를 했다.

공황장애 증상은 사람마다 다르다. 호흡 곤란, 뒷골 당김, 마비 증상 등. 증상은 있지만 원인을 알 수 없다. 공황장애는 어느 날 갑자기 예고 없이 찾아온다.

공황장애를 겪는 이들 중에는 부모나 친구에게 털어놓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정신병을 사회에서 어떻게 대하는지 알 수 있다. 이 씨는 공황장애 환자들은 가족의 응원이 가장 큰 힘이 된다고 말했다. 그는 오랜 투병생활로 공황장애를 다루는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가고 있다. 이씨는 책을 출간하고 크라우드 펀딩으로 얻은 수익 일부를 공황장애 환자를 돕기 위해 병원과 독립서점에 기부했다.

사실 발작이 심할 때면 아무런 행동도 할 수가 없다. 그럴 때는 그냥 눈을 감고 음악을 듣는다. 이 씨는 주로 밴드 음악을 듣는다. 기타, 베이스, 드럼, 건반, 보컬의 위치를 상상하고 각자의 파트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이 씨의 머릿속에서는 공포스러운 괴물 대신 화려한 공연장이 펼쳐진다.

오랜 시간 공황장애를 앓고 있는 이 씨는 “공황장애는 극기정신으로 나아지는 것이 아니다”고 말한다. 연예인의 공황장애 고백에 대해서는 웃고 떠들며 정상적인 모습만 보여주는 그들의 태도는 일반인들에게 공황장애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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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희 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최수희 교수는 이 씨의 담당의다. 이 씨는 책 출간에 앞서 최 교수에게 책의 감수를 부탁하기도 했다. 최 교수는 “공황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이 씨는 자신만의 방법을 찾았다”며 “어려운 과정인데 그림으로 힘든 시간을 견뎌내고 그것을 책으로까지 엮었다니 대견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고 말했다.

공황장애는 호흡과 심박수가 빨라지는 생리 반응 때문에 괴로운 질환이다. 발작이 시작되면 응급약을 복용하고도 30분 정도는 지나야 증상이 가라앉는다. 따라서 평소 이완요법을 훈련하는데 이 씨는 ‘그림’이라는 자신만의 이완 방법을 찾은 것이다. 이완요법을 훈련하는 방법으로 점진적 근육 이완요법 등이 있다. 신체를 긴장시켰다가 천천히 이완시키는 연습을 한다. 예를 들어 주먹을 10초간 꼭 쥐었다가 천천히 호흡을 하면서 풀어준다.

공황장애는 발작이 일어났을 때 스스로를 얼마나 통제할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평소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힘들다거나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겪는다면 전문의와 상의하는 것이 좋다.

홍은심 기자 hongeuns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