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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덕 칼럼]누가 대통령을 핫바지로 만드나

입력 | 2019-06-27 03:00:00

“삼척항 방파제에 북한 어선 들어와”
해경 보고 받은 靑, 국방부와 협의… 대통령은 어디까지 보고 받았나
거짓브리핑 묵인했다면 국민 속인 것, 몰랐다면 보좌진에 우롱당하고 있다




김순덕 대기자

6월 호국보훈의 달, 삼척항에 들어온 북한 목선은 문재인 정부의 안보 실태를 드러냈다는 점에서 상징적이다. 2012년 ‘노크 귀순’처럼 군의 대북(對北) 경계 실패와 고질적 은폐 기질을 노출시킨 ‘해상 노크 귀순’ 정도가 아니다. 청와대가 관여한 사건이다. 문 대통령이 어디까지 알고 있었느냐에 따라 차원이 달라질 수도 있다.

노크 귀순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사건 발생 일주일 이상 우리 군이 폐쇄회로(CC)TV로 북한군을 발견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해당 부대에서 10월 2일 최초 보고 때 잘못 보고했다가 다음 날 ‘문 두드림 발견’으로 다시 보고했음에도 합참은 물론 국방장관까지 뭉개버린 탓이다.

그나마 그 사건은 현 집권당인 야당의 김광진 의원이 국정감사에서 “동부전선이 뚫렸다”고 폭로해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다. 조사 결과 최초의 허위보고, 태만 등이 부대 대대장과 합참 통제실 실무 선에서 벌어졌다는 사실이 대통령에게 보고됐고 장관 사과와 장성 등의 엄중 문책으로 마무리됐다.

이번 사건은 청와대 대변인이 초기부터 청와대 국가안보실에서 상황을 공유하고 협의했다고 폭로해 충격적이다. 해양경찰청은 15일 청와대 국정상황실을 비롯한 관계 기관에 ‘삼척항 방파제에 미상의 어선이 들어와 있는데 신고자가 선원에게 물어보니 북한에서 왔다고 말했다고 신고 접수’라고 정확히 보고했다. 그런데도 국방부는 17일 안보실 행정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우리 군은 북한 소형 목선이 삼척항 인근에서 발견된 경위를 조사 중”이라고 멍텅구리 배 같은 브리핑을 한 것이다.

정부 발표와 달리 북한 어선은 삼척항 민간 항구에 유유히 정박했고, 우리 어민들은 해상 경계가 뚫렸다며 불안해한다는 KBS 보도가 다음 날 나왔다. 문 대통령이 이 뉴스를 봤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날 대통령이 정경두 국방부 장관을 질책했고, 국가안보실의 소홀함이 있었다고 청와대 대변인 고민정이 22일 뒤늦게 페이스북에 천기누설 했을 뿐이다.

중요한 건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이나 윤건영 국정상황실장이 문 대통령에게는 정확하게 보고를 했는지 여부다. 북유럽 순방 후 16일 귀국해 17일 연차휴가를 쓴 대통령은 그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를 수 있다.

만일 문 대통령이 해경 보고는 물론 청와대-국방부 협의 사실까지 알면서도 국방부의 거짓 브리핑을 묵인했다면 보통 문제가 아니다. 대통령이 국민을 속인 것과 다름없다. 문 대통령은 신뢰성 있어 보이는 외양 덕분에 운동권 86그룹에 택군(擇君)됐다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문 대통령에 대한 신뢰도 이걸로 끝이다.

대통령이 어제 통신사 합동 인터뷰에서 “북한 김정은 위원장이 한미동맹이나 주한미군 철수 등을 비핵화와 연계시켜 말한 적 없다”는 말도 믿기 어렵다. 설령 김정은은 말하지 않았다고 해도 작년 9·19 남북 군사합의 이후 주요 한미 군사훈련을 중단한 것이 한미동맹 와해, 주한미군 철수로 가는 길이다.

만일 문 대통령이 북한 어선에 대해 제대로 파악 못한 채 보좌진 말만 믿다가 국방부 브리핑이 거짓임을 알게 됐대도 문제는 심각하다. 흔히 ‘청와대’로 지칭되는 대통령 보좌진이 주군을 핫바지로 만들고 있다는 의미 아닌가.

군 일각에선 군 수뇌부와 청와대가 북한을 자극하지 않도록 조용히 처리하는 게 대통령을 돕고, 정부의 대북 기조에 맞추는 것이라고 판단했다는 추측이 나온다. 청와대가 국민보다 남북관계와 북한 김정은을 더 중시한다는 뜻이다. 현재 진행 중인 국방부 합동조사는 청와대를 건드리지 못하고 피라미 사냥으로 끝날 공산이 크다.

청와대가 대통령에게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다면 이번 목선 사건만 속인 것인지도 의심스럽다. 가뜩이나 청와대비서실이 내각 꼭대기에 올라앉았다는 ‘청와대 정부’다. 남북이 일체의 적대행위를 전면 중지하기로 한 9·19 합의 직후 “사실상 불가침 합의를 한 것으로 평가한다”고 나선 것도 국방장관 아닌 국가안보실장이었다.

9·19 이후 우리 군의 경계태세가 무너졌다는 우려가 끊이지 않는다. 정부가 밀어붙이는 축소 지향의 ‘국방개혁 2.0’으로 강원지역과 동해안을 지키는 2개 군단과 3개 사단 해체설이 돌고 있다. 이번 목선 사건으로 청와대를 다시 보고, 무너진 안보를 다시 세울 수 있다면 천운이겠다.
 
김순덕 대기자 yu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