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옥죄는 집권세력… 입만 열면 혁신성장과 기업 독려 경제는 고등동물 같은 유기체… 기업들은 신뢰 잃고 움츠러들어
이기홍 논설실장
“교장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운동장에 가서 뛰어놀라고 아무리 얘기해도, 깨진 병 조각이 널려있고 불량배들이 어슬렁거린다면 누가 선뜻 운동장에 가겠습니까.”
지난주 문 대통령의 ‘제조업 르네상스 비전·전략’ 선포식 며칠 후 만난 경제인들의 말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이 정부의 혁신 드라이브가 신뢰받지 못하는 이유는 이렇게 요약된다. 첫째 실행전략이 너무 나이브(naive·무지)하며, 둘째 정권발 메시지들이 일관성이 없다는 것이다.
“제조업 해외 직접 투자가 최고치를 기록했더군요. 기업인은 자기 돈에 대한 리스크 관리가 최우선입니다. 정부가 혁신을 독려해도 불안정·불확실성이 제거되지 않으면 국내에 돈을 안 풉니다”
“대통령이 기업을 응원하는 발언을 해 기대를 하면, 곧이어 기업을 옥죄는 메시지가 정부 곳곳에서 터져 나옵니다.”
실제로 현 집권세력만큼 방향성이 엇갈리는 시그널을 남발하는 경우는 드물다. 기업 지원, 규제 개혁을 강조한 직후 반(反)기업 시그널이 나오기 일쑤다. 청와대 경제라인 전격 교체는 반(反)시장적 경제정책의 실패를 인정하는 것일 텐데 대타가 ‘대기업 저격수’다. 화해와 통합을 지향하나 싶었는데 법무장관-검찰총장 라인업에 적폐청산 돌격수들을 배치해 ‘내 뜻대로 가겠다’는 메시지를 발신한다.
선거 때는 서로 배치되는 공약들을 두루 내놓는다 해도 통치 단계에서는 한 방향을 택해 일관성 있는 메시지를 보내야 한다. 이율배반적 목표를 제시한다면 신뢰를 얻을 수 없다.
“기업 혁신을 통해 복지국가 재원을 마련한다는 구상 같은데, 좀 동화책 같은 발상이죠. 기업은 사회와 동떨어져 발전할 수 없습니다. 혁신의 성패는 고용시장의 유연성과 노사관계, 교육시스템, 세금, 조세정책 등 수많은 요소들과 유기적으로 결합돼 있습니다.”
사실 그런 모순적 사고방식은 좌파 진영에 만연해 있다. 혁신에 가장 필요한 요소는 인재인데 수월성 교육은 한사코 거부한다. 대학은 혁신을 이끌어갈 과학·공학 인재를 더 키우고 싶어도 정원규제에 묶여 옴짝달싹할 수가 없다.
이는 경제와 사회를 잉크를 떨어뜨리면 색깔이 변하는 비커 속 단세포생물처럼 여기는 이념 과잉의 산물이다. 경제를 자신들이 기획한대로 바꿔나갈 수 있는 단순물로 착각하는 것이다.
“실물경제는 핏줄과 지방 단백질 세포 피부 등등 수많은 요소가 결합된 고등생물이나 마찬가지인데, 이 정부 사람들은 그냥 로봇처럼 생각하는 것 같아요. 두 발을 다 묶어 놓고도 팔만 따로 움직여 열매를 따올 수 있다고 생각하죠.”
2003년 이라크 침공을 단행한 네오콘은 자신들의 계획대로 개전 43일만에 승전을 거뒀다고 환호했지만 그 후 길고 긴 내전의 수렁으로 빠져들 줄은 아무도 몰랐다. 최고의 수재, 전략의 귀재라 불렸던 그들이지만 사담 후세인 정권 붕괴 후 이라크 내 상황이 그렇게 복잡하게 전개될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 주도면밀하게 전쟁을 기획하고 도상연습을 했지만 이라크 점령 후 벌어진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갈등 관계, 이라크 민중의 그 복잡다기한 반응을 예측한 전략가는 없었다.
극좌건 극우건 이념지향적 엘리트, 책상물림의 특징은 현실의 함수관계를 압도하는 관념, 이상론이다. 선명한 목표와 로드맵을 만들었지만 현실에선 예상 밖의 변수들에 걸려 허우적댄다.
소득주도성장론을 주도한 문재인 정부의 전략가들도 경제현장에서 그런 혼란이 벌어질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런데도 네오콘들이 부시 행정부 임기가 끝날 때까지도 “결국 우리가 옳았음이 증명될 것”이라는 확신을 버리지 못했던 것처럼 청와대는 여전히 “반드시 가야 하는 길”이라며 정책 기조 전환을 거부하고 있다.
“미중 통상전쟁과 글로벌 경기침체 상황에서 기업들은 방향을 어떻게 틀어야 할지 고민이 큽니다. 외부 환경의 불확실성이 큰 이런 때는 국내 환경이라도 최대한 안정성이 필요합니다.”
“기업들은 글로벌 시장을 좌우하는 국제정세 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정부보다 더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정부는 그들만의 국내적 정의로 옥죄네요.”
이기홍 논설실장 sechep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