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화산체 ‘오름’ 분화구 속 퇴적층, 수만 년 전 기후 흔적 담고 있어 지질硏, 4년간 퇴적물 시료 채취 “한라산 형성과정까지 알아낼 것”
임재수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책임연구원이 논고악 분화구 중심에서 시추한 토양에서 시료를 채취하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시추장비. 서귀포=고재원 동아사이언스 기자 jawon1212@donga.com
한참 땅을 파내려가던 시추장비가 잠시 작동을 멈추자 분화구 속 흙을 담은 파이프가 다시 지상으로 올라왔다. 그렇게 1m 단위로 시추를 반복하자 논고악은 점점 그 속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임재수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지질연구센터 책임연구원은 “논고악 분화구 속 퇴적층은 수천수만 년 전 기후(고기후)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며 “분화구 내부 깊은 곳의 퇴적층까지 채취하기 위해 깊이 30m까지 시추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임 책임연구원은 ‘한라산천연보호구역 기초학술조사’ 사업의 책임을 맡고 있다. 2016년 시작한 이 사업은 한라산천연보호구역의 보전을 위해 이 지역 지형·지질, 동식물, 기후 등을 연구한다. 올해는 고지대 분화구 퇴적물 시추 및 시료 채취를 통해 오래전 제주도 기후 환경을 해석하는 연구를 중점 진행하고 있다.
한라산 동쪽의 유명 등산로 입구인 성판악을 지나쳐 남쪽으로 약 3.5km 가면 해발 858m 높이의 논고악 오름이 있다. 서귀포=고재원 동아사이언스 기자 jawon1212@donga.com
지질 연구자들에게 제주도 오름과 내부 퇴적층은 ‘예쁜 그릇’과 ‘타입캡슐’로 불린다. 임 책임연구원은 “마치 오목한 예쁜 그릇처럼 생긴 오름에 쌓인 퇴적층을 통해 타입캡슐을 열어본 듯 흙이 쌓일 당시의 기후를 추측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분화구에 물이 적을 때는 풀과 나무가 자라는 면적이 넓어지는 반면 물이 많을 때는 땅이 물에 잠기며 식물이 자라는 면적이 줄어든다. 풀과 나무는 탄소 동위원소 비율이 달라 당시 고인 물과 풀, 나무의 경계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어 퇴적층이 생길 당시 기후를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논고악의 경우 오랫동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아 더 정확한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 시료를 살펴보던 홍세선 지질연 지질연구센터 책임연구원은 “퇴적층은 오랜 시간 동안 천천히 쌓이며 나이테처럼 뚜렷한 층을 보인다”며 “그런 퇴적층을 밀리미터(mm), 마이크로미터(μm) 단위까지 세밀하게 분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제주 화산에 대한 연구는 주로 산정상의 백록담 주변에 집중됐다. 아직까지 한라산 보호구역 내 40여 개 오름을 비롯해 제주도 오름 대부분의 형성 과정과 시기는 거의 밝혀지지 않았다. 임 책임연구원은 “한라산천연보호구역에서 4년에 걸쳐 진행된 주요 오름의 지질조사와 연대 측정 결과를 종합하면 한라산 전체의 형성 과정을 처음으로 학술적으로 규명하고 한라산 고기후 변화를 알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연구팀은 현재 한라산 곳곳에서 모은 퇴적물 시료를 분석하고 있다. 이를 위해 2016년 백록담, 2017년 물장오리 오름, 지난해 사라 오름 속 퇴적층을 채취했다.
한라산천연보호구역 기초학술조사는 올해 11월 사업이 마무리된다. 연구진은 이때까지 최종 결과 보고서를 내놓을 예정이다. 그동안 연구를 진행해 오며 많은 성과를 냈다. 한라산 백록담이 최소 1만9000년 전에 형성됐다는 사실을 밝혔다. 백두산에만 분포하는 암석으로 알려졌던 코멘다이트라를 한라산 일대에서도 처음 발견했다. 레이저 빛이 물체에 맞고 되돌아오는 시간을 측정해 물체의 형태와 위치를 알아내는 라이다(LIDAR·레이저 레이더)를 항공기에 실어 한라산천연보호구역 전 지역의 모습을 정밀 촬영했다. 이를 통해 한라산의 식생이나 암석, 토양을 살펴볼 수 있는 연구 기초자료를 마련하기도 했다. 성판악 탐방로 침식 및 훼손 현황을 등급화해 한라산 탐방객의 안전을 확보하는 데 도움을 줬다. 임 책임연구원은 “사업 종료 후에도 제주도가 화산과 고기후 연구에 있어 세계적인 기초학술 자료가 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한라산 연구를 이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