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야 미국에서 LG전자 냉장고나 세탁기는 쉽게 살 수 있는데다 글로벌 브랜드 제품과 견줘도 결코 뒤처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된 건 불과 10여 년 전부터다. 이전에는 전자레인지나 청소기 등 소형 가전 위주로 팔리고 있었다.
노숙희 LG전자 H&A 마케팅커뮤니케이션 담당 상무(47)는 대형 가전 불모지와 다름없던 미국 시장을 뚫은 실무자로 꼽힌다. 그는 이런 성과를 인정받아 지난해 상무로 승진했다.
노숙희 LG전자 H&A 마케팅커뮤니케이션 담당 상무. LG전자 제공
1995년 LG전자에 입사한 노 상무는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는 이유로 해외 시장 업무를 담당했다. 그러다가 2002년 LG전자 미국 법인으로 발령이 났다.
맡은 일은 냉장고 프로젝트매니저(PM). 미션은 미국 시장에 냉장고를 갖다 파는 것이었다. 국내에서 LG전자 가전은 승승장구했지만 국내 시장 성장은 한계가 있었다. 거대 시장인 미국을 뚫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당시 LG 브랜드 파워가 약해 초반엔 현지 브랜드를 달고 판매하되 LG전자가 제조해 납품해야 했죠. 미국 가전 점유율 40%에 이르는 가전 브랜드인 K사를 뚫는 게 목표였어요.”
거래업체 브랜드를 달고 팔되 LG전자가 납품하는 것. 다만 나중에 LG전자 독자 브랜드로 팔아야할 걸 염두에 두고, 제품 기획까지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담당자는 5분 만나줄까 말까였고, 다음 미팅은 1년 뒤에 하자는 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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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사리 성사된 미팅에서 LG전자가 품질 좋고 양산 잘한다는 것만으론 부족했죠. 거래 업체 바이어는 자꾸 ‘꼭 LG이어야 할 이유’를 물었죠. 그걸 하도 오랫동안 고민해서 바이어가 언급한 문구(compelling reason)가 아직도 그대로 생각날 정도에요.”
●전쟁 치르며 동지애 다지다
제품 기획을 위해 노 상무를 비롯해 제품 개발(R&D)과 상품기획, 디자인, 영업 등 4개 부문 직원이 팀워크를 이뤄 미국 전역에 있는 매장 곳곳을 출장을 갔다.
“낮에는 발이 부르트도록 돌아다니고 저녁에 호텔 방에 들어와 라면을 함께 끓여 먹으며 제품 아이디어를 냈죠.”
노 상무는 이들과 ‘전쟁’을 같이 치르면서 동지애를 다졌다. 그 결과 당시로서는 드물었던 프렌치도어 냉장고를 개발하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프렌치도어냉장고. 동아일보DB
문제는 내부 설득. 새로운 제품이니 제품 개발 및 양산을 위한 투자가 집행되어야 했다.
“좋은 경찰, 나쁜 경찰(Good Cop, Bad Cop) 전략을 펴기로 했어요. 보고 들어가기 전에 저희 중 한 명이 ‘투자비 많이 들어가지 않나’라는 반대 의견을 일부러 내면, 바로 다른 사람이 투자비를 어떻게 해야 할지 치고 들어가는 식이었죠.”
이런 일은 조직에 대한 오너십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LG전자는 제품 생산을 결정했고 제품은 2004년 미국에서 출시됐다. 개발까지 꼬박 3년이 걸렸다.
●완벽하게 보이려던 게 독이 될 수도
이번엔 당초 목표했던 거래업체를 뚫는 것. 담당자는 여전히 “왜 다른 브랜드의 냉장고가 많은데, 비싼 값을 주고 LG 냉장고를 공급받아야 하느냐”고 물었다. 당시 그는 바이어가 쉽게 일하려 딴죽 건다는 생각에, 그럴수록 더 세게 맞대응했다. 2주일 간 말은 안하고, e메일만 오간 적도 있었다. 노 상무가 무려 A4 용지 세 장에 이르는 답변을 보낼 정도였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제품을 공급받는 것 역시 거래업체 바이어가 본사를 설득해야 하기 때문에, LG전자의 논리에 무장되고 싶어 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바이어 스스로도 준비되어 있어야 하기에 논리가 필요했던 건데, 사사건건 반대하는 걸로 비춰졌었죠.”
바이어가 더 많이 요구했기에 그도 더 치밀하게 준비했다. 미국 소비자들에게 경쟁사 소비자와 LG전자 소비자를 그림으로 그려보게 했는데, 경쟁사 소비자는 나이든 사람인데 지갑을 뒤로 숨기고 있고 LG전자 소비자는 젊은데 지갑을 들고 있는 식이었다. 브랜드 이미지 속에 잠재적으로 녹아난 의식이었다.
이런 노력 끝에 담당자도 설득이 됐고 마침내 2006년 LG전자 제품을 미국 공급할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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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를 돌이켜보니 아쉬운 점도 있었다. 빈틈없이 보이려 했다는 점이었다. 당시 30대 초반으로 나이가 많지 않고 여성이라는 점을 의식해 잘 해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다 아는 것처럼 행동했고, 심지어 할머니들이 많이 쓰는 안경을 쓰고 다녔다.
“완벽하게 행동하려할수록 바이어는 더 많이 요구했어요. 솔직하게 모르는 건 모른다고 하거나 때로는 어리바리 전략을 쓰는 것도 도움이 된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었던 거죠. 알아듣지 못할 때 알아듣는 척 하면 안 됩니다. 알아도 오히려 되물어봐야 할 때가 있고, 전략적으로 불리하면 못 알아듣는 여유도 있어야 했는데, 곧이곧대로 다 잘하는 것처럼 행동했죠.”
●고난의 시기, 다시 팀워크로 극복
노 상무는 회사 생활 중 개인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시기로 2011년 미 상무부가 냉장고에 덤핑 예비판정을 내렸을 때를 꼽았다. 미국 시장에서 선전하고 있는 국내 업체에 위협감을 느낀 미국 가전업체 월풀이 제소한 것. 당시 사내에서도 감사(監査)가 들어왔다.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했을 뿐인데, 이런 나를 못 믿나’라는 생각에 서운함과 회의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부정적인 감정에 빠질 여유도 없었다. 실무자로서 당장 대응책을 마련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기획 영업 관리 등 관계된 각 부문 실무자가 세부적으로 샅샅이 들여다봤어요. 평소에는 서로 도와주지 않고 관리하려고만 한다, 관리할 생각은 안하고 예산만 쓸 생각만 한다 등 날 세웠던 사람들도 이때만큼은 예외였어요. 전투력이 충만해 똘똘 뭉치게 됐죠.”
이들은 덤핑 제소 관련 사항을 샅샅이 리뷰하고 소명 자료를 충분히 냈고, 결국 무혐의 최종 판정을 받았다.
“그날도 바이어와 저녁 식사를 할 때였는데 무혐의 소식을 듣고 바로 소리 질렀어요. 당시 힘들었던 것도 싹 사라질 정도로 기뻤죠. 한 선배는 오히려 우리가 월풀에 고마워해야 한다고 말했어요. 월풀 덕에 우리가 무역 분쟁 대응 역량도 높아졌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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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생활 내내 팀워크로 무장되어 일한만큼 임원이 되어서도 ‘공통의 목적’을 중시한다. 예컨대 상품기획과 영업 부문이 충돌할 수 있는 지점이 있지만 ’우리 모두 제품 개발을 잘 해서 많이 팔아야 한다는 목표가 있지‘라고 떠올리고, 문제 해결을 모색하는 방식이다. 팀원이 업무 분장이 모호한 일을 떠맡게 됐다고 들고 올 경우도 마찬가지다.
“어느 조직에서건 역할 책임 분담(R&R)이 불문명한 그레이 영역이 존재하게 마련인데, 이 부분을 끌어안고 가면 스스로에게 경험과 지식이 쌓인다고 생각해요. 그게 곧 실력이 되고요. 금을 그어놓고 하면 딱 거기까지 배우니까, 선택은 본인이 하는 거죠. 배움의 기회를 갖고 갈 것인지, 말거냐. 저는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고, 하면 지원해주겠다고 해요.”
●직원들에게 실패의 기회를 준다는 것
노 상무는 현재 초임 상무다. 25년간 여러 부문과 두루 일한만큼 소속 후배들에게 이들을 많이 소개시켜주려 한다. 당장 업무와 연관 없더라도 비공식적인 인맥(informal network)을 구축하도록 도와주는 것. 그는 “조직에서 혼자 힘으로 모든 걸 할 수 없다”며 “(직원들이 하는 일이) 잘 굴러가게 기름칠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하나 역점을 두는 건 후배들에게 ’실패의 기회‘를 주는 것. 좋은 리더는 직원을 어디에 내놓아도 프로페셔널하고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같이 일하고 싶어 하는 직원으로 만드는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처음 팀장이 됐을 때 후배들에게 잘해주면 되는 줄 알았어요. 칭찬하고 감싸주고…. 하지만 다른 곳에서도 실력을 인정받게 하는 게 진짜 리더의 역할이더라고요.”
일부 리더는 구성원이 실수하지 않게 하려고 일일이 간섭(micro-management)하기도 한다. 하지만 좋은 리더는 직원이 실수 안하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피드백을 제 때 잘 해주고, 일에 대한 오너십을 주고 실수도 해보고 성공도 해보는 환경을 조성해줘야 한다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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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위험하다 싶을 때에는 막아주지만, 옆에서 팁만 줘도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면 직접 해보게 일을 던져줘야 한다는 것. 그래야 일련의 과정들이 직원의 역량으로 쌓이고 조직이 클 수 있다.
“좋은 리더는 일 맡기는 걸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일을 믿고 맡기고 주시하면서 적당한 실패 경험을 쌓게 만드는 거죠. ’이런 걸 시키면 직원들이 싫어하겠지‘라는 생각에서 일을 던져주지 않거나 반대로 일일이 코치하는 건 배려가 아닙니다.”
김유영 기자 ab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