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3·1운동 임정 100년, 2020 동아일보 창간 100년]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2부 <제62화> 충남 서천
올해 3월 29일은 충남 서천군 마산면 신장리 장터에서 2000여 명이 참여한 ‘마산 신장 만세운동’이 벌어진 지 100년을 맞은 날이다. 일제에 저항하던 장꾼과 주민들의 모습을 재현한 기념행사가 이날 마산면 신장 사거리에서 열렸다. 서천의 만세운동은 타 지역에 비해 횟수는 적었지만 격렬하게 전개됐다. 서천군 제공
“서천의 만세시위는 전북 군산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습니다. 금강을 사이에 두고 군산과 맞닿아 있었던 지리적 영향이 큽니다. 1919년 3월 초 군산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서천에 소식이 알려졌지요.” 21일 만난 유승광 서천지역사회연구소장은 서천에서 만세운동을 일찍이 시도할 수 있었던 분위기를 밝혔다. 1919년 3월 8일 서천군 화양면 주민 조남명이 일제 경찰에 체포된 사건에 대한 설명이었다.
○ “내가 체포된 것은 독립운동 때문”
조남명이 동지들을 모으고 거사를 계획한 것은 군산 3·1운동이 벌어진 다음 날이었다. 조남명에 대한 재판 기록은 다음과 같다. “6일 화양면 구동리 이근호 집에 와서 동인과 한백희, 최경진에 대하여 동 선언서를 보이며 학생들은 국사를 위하여 지금 군산서에 유치되어 조사를 받고 있으니, 우리들은 이를 보고만 있을 수 없으므로 우리도 독립운동을 하자고 하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3·1운동사’)
3·1운동기념비건립위원회와 동아일보사가 세운 새장터3·1운동기념탑. 서천=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 2000여 명이 함께 부른 독립만세의 함성
서천군 마산면 신장리에 살던 송기면이 태극기를 제작하기 시작한 때는 1919년 3월 23일부터였다. 그는 류성렬 이근호 임학규 등 동리 사람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만세운동을 벌일 것을 논의했다. 거사일은 3월 29일 장날. 시장에 나온 군중과 함께 만세를 부른다는 계획이었다. 서천에서 벌어진 ‘마산 신장 만세운동’의 시작이었다.
유승광 서천지역사회연구소장이 한영학교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던 김옥준 옹에게서 들은 이야기도 이를 뒷받침한다. “학교가 달랐다. 애국가를 불렀고 운동장에서 공을 방망이로 치던 생각도 난다. 그때 교육 내용이 일본인과는 등지게 가르쳤던 것 같다”는 게 김 옹의 회고였다.(유승광, ‘서천, 서천 사람들’) 야구로 추정되는 운동을 하거나 애국가를 부르도록 했으며 일본식 교과와는 다른 내용을 가르쳤다는 증언에서, 신식 교육을 실시했고 민족의식을 기르고자 했음을 헤아릴 수 있다. 마산 신장 만세운동을 기획한 송기면 이근호 임학규 등은 20, 30대 청년으로 이곳 한영학교 출신이었다.
기독교의 영향도 컸다. 서천은 우리나라 최초의 성경 전래지이다. 1816년 서천 마량진에 표류한 영국의 함선을 통해 성경이 전해졌다. 기독교 선교사가 정식으로 입국해 선교활동을 전개하면서 1902년 서천지역에 화산교회가 세워진 것을 시작으로 인근 곳곳에 교회가 설립됐다. 이들 교회는 기독교 전파와 함께 근대 교육과 의식 보급에 기여했다. 류성렬 송기면 이근호 임학규 송여직 이동홍 등 마산 신장 만세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은 서천지역 기독교 신자들이었다.(김진호, ‘서천지역의 3·1운동’, 충남문화연구 창간호)
마산 신장 3·1운동은 치열했다. 다른 지역에선 만세운동이 여러 차례 벌어지면서 시위가 점차 공격적으로 전개되는 양상을 띠었지만 마산 신장 만세운동은 서천지역에서 처음 일어난 시위였음에도 일제와의 충돌이 거셌다. 더욱이 마산면 신장리의 장터는 서천군에서 가장 많은 물품이 거래되는 시장이었고, 강경 광천과 함께 호서지방의 3대 시장으로 불려온 곳이었다.(유승광, ‘서천 마산 신장 3·1운동과 교육적 활용’) 그만큼 큰 장이었기에 참여한 군중만 2000여 명에 달했다.
○ 공격받은 출장소는 기둥과 지붕만 남아
“고시상은 송기면 등을 체포했던 순사보를 향해 죽이겠다고 달려들었고, 정일창은 군중의 뒤편에서 출장소 파괴를 적극적으로 후원했으며 이승달은 ‘붙들려간 사람들을 구출하지 않고는 물러갈 수 없다’면서 군중을 독려했다. 출장소는 파괴되어 기둥과 지붕만 남게 되었다”(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3·1운동사’)고 기록될 만큼 마산 신장 만세운동은 격렬했다. 당시 시위자들의 형량이 대부분 징역 1년형 정도였지만 출장소를 직접 공격한 고시상 이동홍 양재흥 이승달 박재엽 등은 징역 3년에서 5년형을 선고받았다.
구금됐던 인사들이 출장소를 탈출해 군중과 함께 서천읍으로 향하던 중 군수 임익채가 말을 타고 달려왔다. “일제 헌병이 매복해 있으니 해산해 달라”는 그의 말에 군중은 격렬하게 항의했다. 이날의 시위는 여기에서 멈췄지만 군중은 다음 날 종천면 화산리에 다시 모여 만세운동을 이어갔다.
김진호 충청문화연구소 연구원은 “타 지역의 독립만세운동은 마을 단위나 면 단위의 인사들이 주도해서 전개했지만 서천의 마산신장 만세운동은 여러 면의 인사들이 한자리에서 함께 주도하고, 참여한 것이 특징”이라고 말했다. 장터에서 만세를 부르다 체포된 주요 인사들이 화양면 한산면 마산면 시초면 등 여러 면을 아우른다는 것이다. 사전에 치밀하게 시위가 기획됐다기보다는 장을 보려던 목적으로 신장을 찾았다가 시위에 참여하게 된 사람들이 운동을 주도하면서 폭발력을 갖게 된 셈이다.
신장(新場)은 새 장터라는 뜻이다. 2008년부터 해마다 이곳에서 개최돼 온 ‘마산 신장 3·1운동 기념행사’는 마산 신장 사거리에서 새장터3·1운동기념탑까지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면서 행진한다. 새장터3·1운동기념탑은 1987년 10월 3·1운동기념비건립위원회와 동아일보사가 공동으로 건립했다. 당시 건립위원회 사무국장을 맡았던 장만용 목사는 “마산 신장 3·1운동 기념행사에 해마다 참여해 왔다”며 “독립을 염원한 3·1운동의 정신이 후대에도 이어지길 기원한다”고 말했다.
▼ 전주-군산 만세운동 이끈 김인전… 서천 한영학교서 사회 첫발 ▼
日警의 표적 되자 상하이로 망명… 김구 등과 함께 한국노병회 창건
김인전(1876∼1923)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만세운동의 배후 지도자로 지목됐다. 당시 그가 목사로 부임한 전주 서문외교회에 모여든 학생들이 전주 3·1운동의 주축이 됐기 때문이다.
앞서 그가 평양신학교에 재학했을 때 방학 중 가르쳤던 군산 영명학교 학생들도 군산 3·1운동에 앞장섰던 터였다. 일경의 표적이 된 김인전은 국내 3·1운동의 진상을 해외에 알리고 독립운동을 계속 전개하기 위해 상하이 망명의 길을 택했다.
독립운동가 김인전이 사회활동의 첫발을 내디딘 곳이 한영학교였다. 서천에서 나고 자란 김인전은 그의 집안이 설립한 한영학교의 교사로 근무했다. “교사로서 김인전의 활동상으로 보아 그의 교육은 학생들로 하여금 민족의식을 고취하여 항일의식을 형성하는 데 초점을 맞췄을 것”이라는 게 김진호 충청문화연구소 연구원의 설명이다. 군산과 전주의 학생들은 물론이고 서천 한영학교 출신 젊은이들도 고향에서 적극적으로 만세운동에 나선 것은 김인전의 영향이 컸다는 것이다.
서천 화양면에 있는 한영학교 터. 동아일보DB·서천=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서천=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