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성 케이웨더 예보센터장·한국기상협회 이사장
전쟁 기간 중에는 엄청난 폭염, 강력한 태풍, 겨울 호우 등이 변수가 됐다. “전쟁 초기에 미군은 적의 총탄 외에도 더위로 많은 목숨을 잃어야 했다. 최고 38도를 넘는 한국의 무더위는 전투 승패를 가르는 주요한 요인이었다.” 6·25 참전 전사가(戰史家) 퓰러의 고백이다. 1950년 8월, 미군은 마산에 배치된 미 25사단으로 하여금 공세로 전환하게 해서 대구 정면의 북한군 주력을 분산시키기로 한다. 그러나 절대적인 장비와 병력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살인적인 폭염과 북한의 게릴라 전술에 고전했다. 결국 미군의 최초 공세작전이었던 킨 전투는 폭염으로 실패하고 만다.
북한에 밀리던 유엔군이 전세를 역전시킨 것이 인천상륙작전이다. 작전을 위해서는 일본에 있는 미군 전함들이 인천으로 이동해야 했다. 그런데 이미 1950년 9월 초 태풍 제인의 영향으로 일본 고베에 정박하고 있던 상륙함대의 배 7척이 파괴됐다. 두 번째 특급 태풍인 케지아가 9월 7일 마리아나해협에서 일본 쪽으로 진행하고 있었다. 케지아는 인천상륙작전 전체를 침몰시킬 수 있었다. 미군 기상대는 미리 함대가 출항하면 태풍의 좌측반원에 들어가므로 항해가 가능하다고 조언했다. 맥아더는 9월 11일에 일본에 있던 전 함대를 인천으로 진군하도록 명령했다. 거친 파도에 시달렸지만 함대는 인천에 도착했고 상륙작전은 성공한다.
한겨울 호우가 전투 승패를 가른 적도 있다. 미 8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은 제천∼영월 지역의 적 주력 세력을 포위해 섬멸하기로 했다. 이른바 ‘적의 주력을 포위 섬멸하는 도살작전’이었다. 그러나 작전이 벌어졌던 1951년 2월에 200mm가 넘는 호우가 내렸다. 지휘소와 보급소가 물에 잠겼고 유선통신망은 단절됐다. 군단장 무어 소장은 전선 시찰 중 헬기 추락으로 사망한다. 전쟁터는 진흙으로 바뀌어 미군 전차들의 진격이 불가능했다. 결국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작전을 종료할 수밖에 없었다. 미군은 전사에서 이 전투를 ‘도살작전을 죽인 호우전투’라 부른다. 이처럼 날씨는 전쟁의 승패를 가름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반기성 케이웨더 예보센터장·한국기상협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