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든 무어는 곧 반도체가 물리적 한계에 도달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차세대 전자소자 개발이 대안으로 연구되고 있다. 인텔 제공
모든 전자통신 기기에서 사용되는 핵심 소자인 반도체는 전자의 전기적 성질인 ‘전하’를 가두거나 이동시키는 방법으로 정보를 저장하거나 전달한다. 이를 위해서는 양(+)전하, 음(―)전하로 대표되는 전하가 머무르거나 지나갈 ‘방’ 또는 ‘길’이 필요하다. 반도체는 이 길을 나노 공정을 통해 수 nm(나노미터·1nm는 10억분의 1m) 수준까지 줄이고 있다. 그런데 3∼5nm 공정에 가면 전자끼리의 간섭이 일어나고 열이 많이 나면서 정보를 처리하는 데 방해가 되는 물리적 한계가 나타난다. 무어의 예측은 반도체와 트랜지스터에 기반한 전자공학이 곧 한계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최근 과학자들은 기존 전자공학이 가진 이런 한계를 근본적으로 돌파하기 위해 미래 반도체와 차세대 전자공학 연구를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아직은 기초 연구지만 일부 기술은 국내 대기업에 의해 제품화돼 시장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아일랜드의 시장조사기관인 리서치앤드마켓은 지난해 말 당시 1조9000억 원대로 추정되던 차세대 전자공학 시장이 2023년에 10배 이상 확대될 것으로 내다봤다.
기존 전자공학에 스핀의 특성을 더한 ‘스핀트로닉스’는 정보 저장과 전달 능력을 크게 높일 것으로 기대되는 기술이다. 하지만 단순히 전자의 특성 하나를 양적으로 추가한 개념이 아니다. 이기석 울산과학기술원(UNIST) 신소재공학부 교수는 “전하는 방향성이 없고 크기만 있는 특성이라 전자가 움직여야만 정보를 전달할 수 있지만, 스핀은 그 자체로 방향성도 지니고 있어 움직이지 않아도 정보를 전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전자를 이동시킬 필요가 없으니 무어의 법칙 한계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스핀의 특성을 활용하면 더 작은 반도체에 더 많은 정보를 저장할 수 있다는 의미다.
과학자들은 전자 하나의 스핀을 이용하기보다는 집단으로 제어해 정보 저장과 전달에 응용하는 연구를 한다. 가령 전교생이 모인 운동장에서 모두 교단을 바라보게 하다가 동시에 좌향좌를 한다면 각각 다른 정보를 저장할 수 있다는 의미다.
연구자들은 이 개념을 실제 고체를 구성하는 원자 속 전자를 이용해 구현하고 있다. 고체의 원자에는 수십 개의 전자가 갇혀 있다. 도체일 경우 이들 사이를 돌아다닐 수 있는 전자인 자유전자가 있는데, 전류를 흘린 뒤 이 자유전자를 이용해 원자 속 스핀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
최근에는 전자의 스핀 방향을 집단으로 잘 조절해 스핀이 한 곳을 중심으로 빙글빙글 돌거나 동시에 한 방향을 가리키게 하는 특이한 구조를 만들고 있다. 태풍의 눈이나 블랙홀을 닮은 이런 구조들을 ‘블로흐 점’ ‘스커미온’ 등으로 부른다.
스핀트로닉스는 이미 부분적으로 상용화 단계에 들어섰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개발했거나 개발 중인 스핀주입자화반전메모리(STT-MRAM)가 대표적이다. 스핀 방향이 비슷한 영역(도메인)을 만들고 전류로 이를 제어해 정보를 저장한다. MRAM은 정보 처리가 빠르고 전원을 꺼도 정보가 사라지지 않아 지금의 주력 메모리반도체인 디램(DRAM)을 대체할 후보로 꼽힌다. IBM은 도메인 사이의 경계를 움직여서 정보를 저장하는 또 다른 기술을 연구하고 있다.
최근에는 또 다른 차세대 자성기술인 ‘밸리트로닉스’ 연구도 활발하다. 전자의 파동에 의해 발생하는 진동에너지를 이용해 정보를 저장하고 전달한다. 6월 17일 이재동 DGIST 신물질과학전공 교수팀은 이렇게 진동에너지가 비슷한 영역 사이의 경계면을 움직여 정보를 저장하는 기술을 실제 물질에서 처음 만들고 제어하는 데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이재동 교수는 “저전력, 초고속 정보저장 플랫폼 개발을 앞당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무어의 법칙
마이크로칩의 집적도가 18개월에 2배씩 늘 것이라고 인텔 설립자 고든 무어가 예측한 법칙.
마이크로칩의 집적도가 18개월에 2배씩 늘 것이라고 인텔 설립자 고든 무어가 예측한 법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