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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균 칼럼]“잘 들었습니다, 내 맘대로 할게요”

입력 | 2019-07-01 03:00:00

소통 채널 막은 ‘박근혜式 불통’… 채널 열고 귀 막은 ‘문재인 불통’
文 장점인 ‘경청’도 실종된 듯… 권력자 불통, 복수혈전 예고
‘평화 지키는 건 대화’ 위험한 믿음… 국민 자존심 상처 주는 ‘屈北 외교’




박제균 논설주간

얘기를 듣는 사람의 표정은 진지하다. 1시간 넘게 말해도 싫은 내색조차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추임새를 넣어준다. 응시하는 눈은 ‘당신 말을 다 이해한다’는 진정성이 넘치는 듯하다. 그런데 얘기를 다 들어준 사람이 마지막에 이런 말을 하면 어떨까.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내 맘대로 할게요.”

‘숨이 턱 막힌다’는 이런 때 쓰는 표현일 것이다. 문재인 집권 2년의 고개를 넘으며 전임 박근혜와는 또 다른 불통(不通)이 국정(國政)의 동맥경화를 부르고 있다. ‘박근혜식(式) 불통’이 소통 채널 자체를 봉쇄한 것이었다면 ‘문재인식 불통’은 소통 채널은 열어뒀지만, 소통 효과가 안 나온다는 것. 쉽게 말해 백날 얘기를 들어도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윤석열 검찰총장 지명에 김상조 대통령정책실장 임명, 이어 조국 법무장관 카드까지 나오자 많은 국민은 ‘이제 체념해야 할 때’라고 느꼈을 것이다.

더 위험한 건 문 대통령의 특유의 장점이던 경청(傾聽)마저 실종될 조짐이 보인다는 점. 기자들에게 외교 문제만 질문 받겠다고 빗장을 치거나, 사회 원로들을 불러놓고 ‘적폐청산에는 타협 없다’고 입을 막아버리는 식 말이다. 심지어 ‘혼밥’ 논란까지 나온다. 권위적으로 변한 역대 대통령을 실패로 몰고 간 그 길이다.

늘 문 대통령과 비교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견(異見) 있는 사람에게 자기 생각을 관철시키려 치열하게 토론했다. 자기 생각이 너무 강한 게 문제였지만, 남 얘기를 듣고 생각을 바꿀 줄도 알았다. 그런데 문 대통령에게는 그런 피드백이 좀처럼 나타나질 않는다.

‘문재인의 그림자’ 프레임도 그를 잘못 봤기에 나온 듯하다. 정치를 원치 않는 문재인을 친노(親盧)가 ‘대표상품’으로 내세워 대통령까지 만들었기에 과연 뒤에서 대통령을 움직이는 사람은 누굴까, 하는 뒷말이 많았다. 그런데 이제 와서 보니, 문 대통령을 움직이는 사람은 남이 무슨 말을 하든 꿈쩍하지 않는 문재인 자신이다.

박근혜식이든, 문재인식이든 최고권력자의 불통이 낳는 결정적 폐해는 내 편과 네 편 사이에 넘기 힘든 장벽을 쌓고, 건널 수 없는 계곡을 파는 것이다. 이는 현 정부의 적폐청산이 그렇듯, 정권이 교체되면 또 다른 ‘복수혈전’을 예고한다.

한데, 복수라는 게 그렇다. 2대 맞으면 3대는 때려야 직성이 풀리는 게 보통 인간의 심사(心思)다.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복수의 강도가 증폭되는 이유다. 단적으로, 문재인 정부 들어 지상파 방송에서 벌어진 복수전이 그랬다. 이러니 정권을 뺏기면 닥쳐올 복수에 대한 공포도 커질 수밖에 없다. 결국 정권을 놓지 않기 위해 무리수를 두고, 그 무리수가 또 다른 복수심을 낳는다. 대한민국이 점점 황폐해져 갈 수밖에 없다.

권력자의 불통이 부르는 독단(獨斷)이 나라 안에만 영향을 미친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외교에까지 끼치면 국민의 안전을 위협한다. 어제 판문점에서 역사적인 이벤트가 있었지만, 그만큼 한국은 안전해졌을까. 말끝마다 자신이 대통령이 되기 전과 후를 비교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그의 관심은 온통 재선이다. 그런 트럼프를 구슬려 핵보유국 지위와 안전보장을 얻어내려는 김정은. 나이답지 않게 노회하다.

이 둘의 흥정 대상인 핵문제가 가장 안보와 직결된 나라는 미국도 중국도 일본도 아닌 한국이다. 한국 대통령이라면 트럼프-김정은 협상 과정에서 우리의 안보가 길을 잃지 않도록 경계하는 것이 최우선 책무다. 그런데도 군통수권자인 대통령부터 ‘평화를 지키는 건 대화’라는 위험한 믿음을 고수하고 있다. 이러니 무더기 대북 지원을 하면서도 ‘제발 좀 받아가라’고 도리어 애걸하는 전도(顚倒) 현상이 벌어지는 게 당연하다. 국민적 자존심까지 상처 주는 ‘굴북(屈北)외교’가 아닐 수 없다.

이 모든 게 한번 길을 정하면 벗어나지 못하는 ‘문재인식 불통’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생전의 노 전 대통령은 문 대통령에 대해 “정치가 전혀 안 맞는 사람”이란 인물평을 했다고 한다. 과거에는 ‘정치가 안 맞는 순수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새겼다. 그런데 요즘 와서는 다른 생각이 든다. ‘타협의 예술’인 정치와는 거리가 먼 문재인 스타일을 너무 잘 알았기에 그랬던 건 아니었을까.

박제균 논설주간 ph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