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어제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와 관련해 “국가와 국가의 신뢰관계로 행해온 조치를 수정한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로 신뢰관계가 손상됐기 때문에 내놓은 보복 조치라고 사실상 인정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우리 정부의 세계무역기구(WTO) 제소 방침에 대해선 “WTO 규칙에 정합적이다. 자유무역과 관계없다”고 주장했다.
일본은 수출 규제의 이유로 ‘신뢰관계 훼손’을 들면서도 보복 조치가 아닌 ‘안보를 위한 수출 관리’라는 앞뒤가 안 맞는 이율배반적 설명을 하고 있다. 외교적 사안을 경제적 보복으로 대응하는 치졸한 방식이지만 WTO 제소를 의식해 표면적으로는 보복 조치가 아니라고 강변하는 것이다. 일본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규제 품목 확대, 관세 인상, 비자 발급 제한 등 추가 보복 조치도 흘리고 있다.
하지만 정치·외교 갈등을 경제 문제에 직결시킨 이번 보복 조치에 대해 일본 내에서조차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한국에 대한 제재가 부메랑으로 돌아와 일본 기업도 타격을 입을 것이며 자유무역을 정면으로 역행한 조치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결국 승자는 중국이 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도 “한국산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를 이용하는 일본 기업에 부메랑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비판이 아니더라도 아베 정부는 미국이 무역확장법 232조를 들먹이며 안보를 핑계로 일본차에 고율의 관세를 매기려고 할 때마다 자유무역 체제가 흔들려 세계 경제에 악영향을 줄 것이라고 강조해온 스스로의 발언에 이번 결정을 비춰봐야 한다.
한국 정부는 우리 기업들이 입을 피해에 대해 보다 종합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정부가 검토 중인 WTO 제소는 최종 판결까지 2년 넘게 걸려 실효성이 의문이며 또 다른 대응책으로 일본 여행 제한이 거론되지만, 이 카드는 한일관계를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 뿐이다. 한일 모두 국내 정치와 지지층 여론을 의식한 감정적 대응 대신 냉정을 찾아야 한다. 정치는 정치로 풀되 자유무역과 경제, 민간 교류는 정치의 속박에서 풀어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