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자신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가스실의 그림자 속에 살았다며 그때의 경험을 사형수에게 얘기해줬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실존적 상황에서조차 삶이 의미로 충만하다는 생각을 결코 버린 적이 없다고 했다. 결국 삶은 의미가 있거나 없거나, 둘 중 하나가 아닌가. 의미가 있다면 아무리 짧게 살더라도 의미가 있어야 하고, 의미가 없다면 몇 년 더 살면서 무슨 일을 끝없이 해봤자 아무 의미가 없을 터였다. ‘나를 믿으세요. 지금까지 의미가 없었던 삶, 즉 허비된 삶조차 이 문제를 갖고 씨름하는 걸 통해서 마지막 순간에라도 의미가 주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생각을 보완하기 위해 톨스토이의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요약해 소개했다.
톨스토이의 소설은 갑자기 병에 걸려 며칠 내로 죽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 60대 노인에 관한 이야기다. 스토리의 요체는 출세와 승진만을 목표로 살아온 항소법원 판사가 죽음에 직면해 자신이 삶을 허비했으며, 자신의 삶이 아무 의미가 없는 삶이었다는 걸 깨닫고, 그 깨달음을 통해 ‘자신을 넘어서고 성장하고 결국에는 삶이 의미로 넘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정신의학자가 이렇게 얘기한 것은 죽음을 앞둔 판사가 그랬듯, 사형수가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거기에서 깨달음을 얻었으면 싶어서였다.
사형수가 야만적인 사형 집행으로 죽기 전에 신문기자와 나눴던 인터뷰를 보면, 그 충고를 받아들이고 마지막 며칠을 살았음이 확실했다. 그에게 그런 충고를 한 사람은 무의미하고 허무한 삶에 절망하며 때로는 자살충동까지 느끼는 현대인들을 위한 로고세러피, 즉 의미치료의 개념을 도입한 정신의학자 빅터 프랭클이었다. 그가 사형수에게 했던 것은 일종의 의미치료였다.
왕은철 문학평론가·전북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