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구를 통해 ‘주체’의 의미 탐구 ‘당신의 몸이 전쟁터다’ ‘LOSER’ 등 1980년대부터 작업한 44점 전시
바버라 크루거가 1996년 영국 잡지와 협업한 설치 작품 ‘무제(데이즈드 앤드 컨퓨즈드를 위한 프로젝트)’. 사진 속 인물들의 냉소적 발언을 크루거의 트레이드마크인 붉은 상자 속 흰 글씨로 써넣었다.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제공
‘당신의/몸이/전쟁터다(Your body/is a/battleground)’.
미국 예술가 바버라 크루거(74)의 대표작인 이 작품은 1989년 미 워싱턴에서 낙태 합법화를 주장하며 열린 ‘여성 행진’ 집회를 위해 만든 포스터다. 당시 크루거는 집회 주최 측을 돕고 싶다고 연락했지만 ‘이미 홍보대행사가 있다’는 답을 듣고 스스로 포스터를 제작해 늦은 새벽 거리 곳곳에 붙였다. 이 포스터는 이후 페미니즘의 고전적 이미지로 자리 잡았다.
1989년 미국 워싱턴의 낙태 합법화 집회를 위해 만든 포스터 ‘당신의 몸이 전쟁터다’. 위키미디어커먼즈·Wwiktoria
크루거의 작품에서 ‘나’와 ‘너’ 등의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독일 철학자 발터 베냐민, 프랑스 평론가 롤랑 바르트 등에게 받은 영향이다. 바르트가 ‘저자의 죽음’을 통해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의미와 견해가 생겨날 수 있음을 보여줬듯, 크루거는 문구를 통해 ‘주체’의 의미를 탐구한다.
“전업 예술가가 되기에는 너무 가난해 늘 일을 해야 했다”는 그는 자신의 작품이 대중에게도 쉽게 읽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영어를 쓰지 않는 국가에서 작품을 선보일 땐 그 나라의 언어를 사용했다. 이번 전시에도 두 작품, ‘무제(충분하면 만족하라)’, ‘무제(제발웃어제발울어)’를 한글로 제작했다.
특히 ‘제발웃어제발울어’는 작가가 해당 전시실을 보다가 “‘please laugh please cry’라고 쓰고 싶다”며 제작했다고 한다. 또 미국에서 작업한 ‘충분하면 만족하라’는 아직 컴퓨터 디자인 프로그램을 활용하지 못하는 작가가 연필, 지우개, 자를 활용해 도안을 직접 만들었다는 후문이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