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세잔, 사과와 오렌지, 1899년경.
세잔은 화가로 성공하기 위해 파리로 왔지만 살롱전에서 작품이 계속 거부당하자 자신을 실패한 화가로 여겼다. 스스로 ‘예리하지 못한 눈을 가졌다’고 생각한 그는 자신의 부족함을 오래 관찰하는 노력으로 채우고자 했다. 그가 사과를 그림의 주제로 선택한 건 구하기 쉽고, 잘 썩지 않아 오래 관찰할 수 있고, 위치를 이리저리 바꿔도 말 한마디 없는 완벽한 모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초상화를 그릴 때도 모델들에게 사과처럼 가만히 앉아 있기를 요구했다.
세잔은 “사과로 파리를 놀라게 하겠다”며 사과 그림에 평생 매달렸다. 말년 대표작인 이 그림을 보면 한 화면 안에 다양한 시점이 존재한다. 가운데 높이 솟은 과일 그릇과 쏟아질 것 같은 왼쪽 접시의 사과들, 오른쪽 물병 주변의 과일들은 모두 바라본 시점이 다르다. 복잡한 문양의 소파, 주름진 흰 천, 하얀 접시와 꽃무늬 물병 등은 화가가 의도적으로 배치한 것이다. 한 시점에서 바라본 대상을 원근법에 따라 그리는 것이 당연하던 시대에 이렇게 복수 시점으로 그린 그림은 이해는커녕 조롱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세잔의 독특한 그림 양식은 입체파나 초현실주의 등 이후 전개되는 현대미술에 큰 영향을 주었다.
오랜 관찰을 통해 자신만의 눈으로 대상을 분석하고 재해석했던 세잔은 누구보다 예리한 눈을 가진 화가였다. “나의 유일한 스승, 세잔은 우리 모두의 아버지다.” 입체파의 선구자 파블로 피카소가 한 말이다. 40년을 매달린 사과 그림으로 미술의 새로운 길을 연 세잔. 스스로는 실패한 화가로 여겼지만, 미술사는 그를 ‘현대미술의 아버지’라 부른다.
이은화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