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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패구상(兩敗俱傷)[횡설수설/이진구]

입력 | 2019-07-04 03:00:00


2016년 12월, 주광야오 중국 재정부 부부장은 베이징에서 열린 ‘2016∼2017 중국경제연회’에서 ‘중미 경제무역 관계의 건강한 발전 촉진’이란 주제의 연설을 했다. 당시는 대중(對中) 강경 노선을 예고한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의 취임을 앞두고 양국이 무역 난타전을 벌이던 시기. 주 부부장은 “양국 간 무역전쟁으로 양패구상(兩敗俱傷·양쪽이 다 패하고 상처를 입음)하는 것은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트럼프 당선인의 외손녀인 아라벨라 쿠슈너(당시 4세)의 동영상을 소개했다.

▷중국어를 배우던 아라벨라는 같은 해 초 가족파티에서 빨간 치파오를 입고 당시(唐詩) 를 암송하며 재롱을 떨었는데 이방카가 인스타그램에 올린 이 영상이 트럼프가 당선되면서 화제가 됐다. 동영상은 14초에 불과했지만 중국 주요 동영상 사이트를 통해 폭발적으로 확산됐다. 주 부부장은 미국의 대중 무역 강경노선이 지속되면 미국도 3년 내 경기침체에 빠지고 500만 개의 일자리가 줄 것이라면서, 양국이 긴밀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임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로 아라벨라의 동영상을 소개한 것이다.

▷중국 신화통신이 한국에 대한 일본 정부의 반도체 소재 품목 수출 규제에 대해 “양패구상의 우려가 있다”고 논평했다. 양패구상은 사냥개가 토끼를 쫓다 둘 다 지쳐 죽었다는 견토지쟁(犬토之爭)에서 유래한 고사성어. 한국에 대한 경제보복이 일본에도 자기 발등을 찍는 자충수가 될 수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에칭가스(고순도 불화수소)를 제조하는 일본 회사 스텔라케미화는 연간 120억 엔가량을 한국에 수출했지만 올해는 전망이 불투명해졌고, 주가도 하락했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소재 공급이 끊겨 삼성전자의 생산에 지장이 생기면 반도체를 이용하는 모든 기기의 생산이 정체돼 혼란이 전 세계로 퍼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일본을 포함해 전 세계 정보기술(IT) 기업들이 한국 공급업체들에 메모리반도체 수출 물량이 충분한지를 문의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일본 내에서조차 중국만 어부지리(漁夫之利)를 얻을 것이란 소리가 나온다. 월스트리트저널도 “유일한 승자는 중국이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수준 낮은 지도자는 멀리 보기보다는 당장의 정치적 유불리로 결정을 내린다. 그 뒷감당은 국민이 떠안아야 한다. 한일 간에는 쉽게 풀기 힘든 과거사가 있지만, 협력해야만 하는 현실도 있다. 경제·안보적으로 한국이 타격을 받으면 그 여파는 일본에도 고스란히 전가된다. 양패구상을 우리식으로 말하면 ‘너 죽고, 나 죽자’다. 그걸 막아야 하는 정치가 그걸 만들고 있다.

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