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경제보복 파문]반도체 3개 소재 日수출규제 첫날
“당신들도 한국에 수출을 못 해 재고가 쌓이면 피해가 크지 않나. 극적으로 사태가 해결될 수 있으니, 일단 수출 신청이라도 해보자.”
“우리도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이다. 팔고 싶지만 정부가 못 팔게 하니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4일 오전 한국 반도체 기업 일본법인 소속의 A 씨와 거래처인 일본 반도체 기업 직원 B 씨가 나눈 대화다. 일본 정부가 일제 강제징용 배상 문제를 빌미로 한국 수출 규제를 시작한 첫날 일본 도쿄에서 펼쳐진 풍경이다.
일본이 수출규제 품목으로 지정한 포토레지스트(감광액), 에칭가스(고순도 불화수소),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등 3개 소재는 재고가 1∼3개월 치에 불과하다. 특히 에칭가스는 장기 보관이 어려워 재고가 1개월 분량이 채 되지 않는다는 분석도 있다. 최악의 경우 한 달 후에 반도체 생산 차질이 현실화될 수 있다는 얘기다.
일부 업체는 규제가 시작된 이날도 일본 업체들을 설득해 수출신고서를 일본 경제산업성에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정부가 통상 90일이 걸리는 심사 절차를 계속 지연시키거나 수출을 불허할 수도 있지만, 한일관계가 호전돼 규제가 느슨해질 경우 한시라도 빨리 조달하기 위한 조치다. 한 반도체 업체 관계자는 “일본 기업들의 정부에 대한 불만도 상당해 이번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지 예단할 수 없다”며 “일단 수출 서류를 제출이라도 해봐야 어떻게 거부되는지도 알 수 있고, 모든 시나리오에 대비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국내 업체들은 일본 정부가 수출 규제 방침을 밝힌 1일부터 물량 추가 확보를 위해 일본 기업들을 필사적으로 접촉했지만 한정적인 수량만 확보한 것으로 전해졌다. 업계 관계자는 “일본 소재 기업을 설득해 수출 계약을 맺었어도 사흘 동안 모든 절차를 다 밟기 어려웠다. 물리적으로 어려움이 많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대만에 공장을 둔 일본 업체가 있다는 첩보가 있어 소재 확보를 타진했지만 허탕을 치기도 했다”고 했다.
삼성전자는 애플, 퀄컴 등 고객사에 “현재 수준의 생산량을 지속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며, 추후 변동사항이 발생하면 추가 정보를 다 제공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일일이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김기남 삼성전자 부회장은 한 행사에서 “정부와 분야별로 긴밀하게 공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 기업들은 자체 대응책 마련에 나서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에칭가스 제조업체인 스텔라화학도 싱가포르 공장을 활용한 대체 수출 방안을 모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선 일본 정부의 이번 수출규제로 중국이 가장 이익을 볼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와세다대 경영대학원 오사나이 아쓰시(長內厚) 교수는 본보와의 e메일 인터뷰에서 “한일 기업이 무역 분쟁으로 함께 무너져 국제경쟁력이 떨어지면 결국 승자는 중국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유근형 noel@donga.com·최지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