獨 베를린 장벽 붕괴 30년 현장을 가다
독일 베를린 장벽을 보존해 벽화를 그린 ‘이스트사이드갤러리’는 전 세계에서 베를린으로 찾아온 관광객들이 들르는 필수코스다. 이 중 가장 명물인 ‘형제의 키스’ 앞은 사진찍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베를린=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베를린을 찾은 여행객들은 높이 3.6m의 장벽에 그려진 다양한 벽화를 사진에 담느라 분주했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은 이들이 몰린 곳은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에리히 호네커 동독 사회주의통일당 서기장이 키스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형제의 키스’였다. 옆 가게에선 무너진 장벽의 콘크리트 조각이 기념품으로 팔리고 있었다.
이제 베를린 장벽은 과거의 추억으로 남았다. 독일은 장벽이 무너진 뒤 통일을 맞았지만 통일의 후유증은 30년이 지나도록 남아 있었다.
“하나의 유령,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유럽에 떠돌고 있다.”
2013년에 창당된 극우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은 동독 지역에서 높은 지지를 받아 2017년 9월 총선에서 12.7%의 표를 얻어 제3정당으로 연방하원에 진입했다. 지난해에는 독일의 16개 주 의회에 모두 진출했고 정당 지지도 조사에서 2위에 올랐다. AfD는 여세를 몰아 프랑스 극우 포퓰리즘 성향 정당 ‘국민연합(RN)’ 등과 연대해 ‘정체성과 민주주의’라는 범유럽을 아우르는 극우 정치그룹을 만들었다. 이 그룹은 유럽의회에 73명의 의원을 둔 제5당으로 부상했다. 이들의 약진은 이제 시작이다.
AfD의 지지 기반은 동독이다. 왜 동독인들은 극우 정당에 빠졌을까.
통일 전 동독 라이프치히대에서 저널리즘을 가르쳤던 불프 스카운 박사는 “20년 전만 해도 작센주(옛 동독)는 사회주의자들이 득세해 ‘붉은 작센’이라고 불렸는데, 지금은 이곳에서 AfD가 가장 강한 정당이 됐다”고 말했다. 과거의 사회주의자들이 이제는 극우로 변신했다는 것이다.
베를린자유대 앙케 피들러 교수는 “동독인은 2등 국민이라며 불만이 많다”며 “극우의 득세는 동독인들이 통일 이후에 갖는 불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했다. 통일의 후유증이 30년 뒤 극우 정당의 득세로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통일 후 30년 동안 이러한 과정을 겪은 동독인들은 난민들이 똑같은 사회보장과 기초생활보장을 받으며 이웃으로 정착하자 큰 충격을 받았다. 베를린자유대 김상국 교수는 “동독인들은 극우 정당 지지를 현실에 대한 실망감과 박탈감을 표시하는 가장 효과적인 저항이라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현재의 정치 기득권에 대한 불만이 극단주의자들에 대한 지지로 분출되고 있다는 얘기다. 이 때문에 극우가 득세하면서 독일 내에 인종차별과 혐오 발언이 확산되고 한국인들까지 피해를 입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 과연 독일 통일에 후회는 없었을까
통일은 동독인들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을까. 지난달 18∼26일 베를린과 드레스덴, 라이프치히 등 동독 지역을 다니며 만난 20여 명의 정치인, 학자, 언론인, 시민단체 활동가들은 모두 “독일 통일은 필연”이라고 입을 모았다.
정범구 주독일 한국대사는 “6월 초 베를린 훔볼트대와 ‘장벽은 과연 사라졌는가’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열었는데 ‘독일 통일은 전반적으로 성공적’이라는 게 현지의 보편적 평가”라고 전했다.
그런데도 동독인들은 왜 불만을 갖는 것일까. ‘라이프치거 폴크스자이퉁’의 얀 에멘되르퍼 편집장은 “과거 사회주의권 국가 중 동독만큼 정치·사회적으로 발전한 곳이 없다. 그러나 동독인은 이웃 나라와 비교하지 않고 서독과 비교하기 때문에 불만이 크다”고 말했다.
독일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문 앞이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다. 브란덴부르크문은 독일이 분단됐던 시절 동서독을 가르는 경계선이 됐다. 베를린=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라이프치히 현대사포럼 위르겐 라이히 박물관장은 “독일 통일의 시초가 됐던 라이프치히 시위를 주도한 20대 청년들이 지금 50대가 되면서 현실에 절망했고 극우파를 지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독인들에게 당한 차별도 동독인들에게는 깊은 상처로 남아 있었다. 당사자인 스카운 박사는 “통일이 되자 수준 낮은 서독 사람들이 식민지로 물밀듯 몰려와 동독 최고 엘리트들을 무시하면서 쓴맛을 느꼈다”고 거친 분노를 쏟아냈다.
독일 중부방송의 아나이스 로스 편집자는 역사적인 1989년 9월 10일 라이프치히 비폭력 시위 장면을 유일하게 촬영해 위험을 무릅쓰고 서독에 전송한 인물이다. 그는 서독과 동독 사람들에게 라이프치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주려 했다. 통일이 되자 그가 일하던 중부방송의 경영진은 기술 담당 임원 단 한 명만 빼고 모두 서독 사람으로 바뀌었다. 동독 주민이 동독 임원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동독에서도 40대 이하 세대에겐 통일이 먼 과거 일로 기억된다. 하네스 모슬러 독일자유대 교수는 “일반적인 독일인이 갖고 있는 통일에 대한 생각은 기억하면서도 잊어버리는 것”이라고 했다. 40대 이하 세대에게 통일은 기념일과 다큐멘터리, 자서전에서나 볼 수 있는 과거이며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앞으로 살아야 할 시대라는 것이다.
그러나 젊은 세대는 서독으로 옮겨가고, 동독에는 과거의 향수에 잠긴 노령 세대가 남아 늙어가고 있다. 통일 전 동독의 인구는 1600만 명, 서독은 6000만 명이었다. 현재 동독 인구는 1400만 명으로, 서독에서 약 200만 명이 이주해왔음을 감안하면 400만 명 이상의 동독인이 통일 후 서독에 간 것으로 추정된다.
장벽 붕괴 30년 뒤 독일의 모습은 통일을 지향하는 한국에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통일 후 동독에서 가장 빠르게 변신한 이들은 정보기관인 슈타지 요원들이었다. 이들은 슈타지에서 쌓은 정보와 네트워크를 활용해 경비회사, 보험회사, 공해제거회사 등을 차려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한반도가 통일되면 주민들을 탄압하고 감시하던 북한 보위부 요원들이 어떻게 변할지를 보여주는 반면교사라 할 수 있다.
김상국 교수는 “독일과 한국의 통일은 상황이 너무 달라 비교하기는 어렵다. 다만 우리는 통일 과정에서 더욱 어려운 일들이 벌어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베를린·드레스덴·라이프치히=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KPF 디플로마-평화저널리즘 교육과정의 하나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