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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곡 발표 즉시 SNS에 번역가사 공유… 케이팝 세계화 이끌어

입력 | 2019-07-08 03:00:00

[컬처 까talk]K문화 성공 뒤엔 ‘번역의 힘’




지난달 1일 BTS가 공연한 영국 런던 웸블리스타디움에는 유럽 아미들이 대거 몰려 위세를 자랑했다. 런던=뉴시스

방탄소년단(BTS) 해외 콘서트에서 한국어 ‘떼창’은 이젠 익숙한 풍경이다. 유튜브 등을 통해 팬들이 가사 ‘선행학습’을 해오기 때문. BTS의 ‘IDOL’ 뮤직비디오에는 “지화자 좋다” “덩기덕 쿵더러러러”처럼 지극히 한국적인 추임새가 ‘Hooray it‘s so awesome’, ‘Bum badum bum brrrrumble’ 등 외국인도 알기 쉽게 번역돼 있다. “가장 한국적이면서 세계적인 노래”라고 해외 팬들이 치켜세우는 데 번역도 한몫한 셈이다.

이처럼 한국 문화콘텐츠의 세계적 성공은 적절한 번역에 상당 부분 빚지고 있다. 해외 팬들에게 탄탄한 아이돌 음악은 물론이고 영화나 문학에서도 K콘텐츠를 알리는 첨병 역할을 톡톡히 한다.

가장 눈에 띄는 케이팝은 그 중심에 국내 팬들이 있다. 이들은 소속사에서 운영하는 아이돌 공식 계정과 별개로 신곡이 나오면 부지런히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여러 외국어로 가사를 번역해 나른다. 트위터 ‘감자밭할매’ ‘아미살롱’ 등 일명 ‘번역계’라 불리는 팬들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가사뿐 아니라 아이돌 소식이 담긴 한국어 기사, 멤버들의 일상을 다룬 브이로그 영상까지 번역한다. ‘Oppa(오빠)’ ‘Unnie(언니)’ ‘Aegyo(애교)’ 등 ‘돌민정음’(아이돌과 훈민정음을 합한 신조어)을 소개한 글도 수두룩하다. BTS 팬 박현정 씨(23·여)는 “해외 투어를 다니기 시작하면 정보를 얻기 힘들었는데 지금은 언제 어디서 활동하든 ‘팬질’이 가능해졌다”고 했다.

영화 ‘기생충’에서 재학증명서를 위조한 딸 기정(박소담)에게 기택(송강호)은 “서울대 문서위조학과 뭐 이런 것 없냐”고 말한다. ‘서울대’의 상징성을 고려해 ‘옥스퍼드대’로 바꿔 번역했다. 유튜브 화면 캡처

영화 번역의 중요성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더욱 조명 받고 있다. 해외에서 호평을 받은 ‘똥파리’(2008년) 이후 독립영화도 외국어 자막을 제작하는 문화가 정착됐다. ‘칠곡 가시나들’(2018년)은 할머니들의 경북 사투리를 미국 남부 사투리로 표현해 말맛을 살렸다.

표현이 한국적일수록 번역이 어려운 건 당연지사. ‘기생충’ 번역을 맡았던 영화평론가 달시 파켓은 ‘짜파구리’를 라면(Ramen)과 우동(Udong)을 합친 ‘Ramdong’으로 번역하는 데만 2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카카오톡’과 ‘곱등이’는 외국인들에게 익숙한 ‘왓츠앱’ ‘노린재(Stink bug)’로 바꿨다.

“Wow, Does Oxford have a major in document forgery(서울대 문서위조학과 뭐 이런 것 없나)?”

특히 의역과 직역 가운데 한 가지를 택하는 일은 번역자와 감독에겐 큰 고민거리다. ‘기생충’에서 재학증명서를 위조한 딸 기정(박소담)에게 기택(송강호)이 한 이 말은 “서울대가 상징하는 의미가 전달돼야 한다”는 봉 감독의 요청에 따라 옥스퍼드대로 교체했다. ‘살인의 추억’(2003년)에서 “밥은 먹고 다니냐”는 두만(송강호)의 대사는 외국인에게 더 친숙한 “Do you get up early in the morning too?”가 됐다.

최근 각광 받는 K문학의 번역자는 한국인, 외국인, 교포 2세 등으로 다양하다. 한쪽 언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공동 번역자를 두거나 제3자에게 초벌 번역을 의뢰하기도 한다. 문학 번역은 다른 분야에 비해 난도가 높다. 작가의 숨은 의도와 문체의 맛까지 살려야 하기 때문이다. 해외로 한국 문학을 수출하는 KL매니지먼트의 이구용 대표는 “예전보다 상황이 개선됐지만 여전히 검증된 번역자를 찾기 힘들다”고 했다.

시 번역은 뭣보다 까다롭다. 문법에 얽매이지 않는 데다 사전에 없는 관용구 빈도가 높아서다. 이 때문에 시인과 번역자 간의 소통이 매우 중요하다. 주어를 넣느냐 빼느냐, 관용 어구를 어떻게 옮기느냐 등 구조가 달라 논의할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 고통의 산물은 큰 찬사를 받는 결과물로 탄생하기도 한다. 최정례 시인(54)의 시 ‘얼룩덜룩’은 영국인 번역가 매토 맨더스롯과 협업해 2017년 ‘Zebra Lines’로 번역했다. 나무 그늘에 몸이 얼룩덜룩한 모습을 ‘얼룩말 무늬’로 표현한 것. 당시 옥스퍼드대에서 한국 시 최고 번역상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현실에서 문화콘텐츠 번역은 여전히 부차적 요소로 취급받는다. 그렇다 보니 번역자들은 여전히 빠듯한 마감 시간에 시달린다. 번역비도 중국, 일본 시장과 비교해 절반 수준에 머물러 있다. 파켓 씨도 “5일 만에 급하게 완성해 넘긴 영화도 많다”고 털어놓았다.

번역 시스템이 전체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헌식 문화평론가는 “웹소설이나 웹드라마 등 새로운 콘텐츠가 출현하고, 유튜브 등 유통 방식도 다양해졌다”며 “번역 방식과 플랫폼도 이런 흐름을 적극 반영할 수 있는 고민이 필요하다”고 했다.

신규진 newjin@donga.com·이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