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은 16, 17세기에 세워져 성리학의 본거지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국가가 설립한 학교인 성균관이나 향교와 달리 서원은 지방 유생들이 설립한 사립 교육기관입니다. 서원은 조선 후기 약 600곳에 이를 정도로 크게 늘어나 학문 융성과 인재 양성의 중추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일부 서원이 면세 특권을 누리고 붕당정치와 결부되면서 왕권 약화의 구실이 돼 흥선대원군을 거치면서 대부분 사라지게 됩니다.
요즈음 자율형사립고(자사고) 폐지 정책을 보며 조선 후기 서원 철폐를 떠올립니다. 사학의 자율성을 없애고 수월성 교육을 멀리한다는 점에서 유사합니다. 하지만 서원과 달리 자사고는 통치 권력에 부담을 준 적이 없으며 오히려 국가 재정을 절감하는 데 기여해 왔습니다. 전국 단위 자사고는 정부 예산 지원을 한 푼도 받지 않으니 말입니다.
올해 자사고 재지정 평가에서 상산고의 탈락 소식이 전해지며 큰 파장이 일었습니다. 상산고 외에도 안산동산고 부산해운대고도 고배를 들었습니다. “학교 세울 때 벽돌 한 장 사준 적이 없는 정부가 사학을 호주머니 속 물건 취급한다”고 토로한 홍성대 이사장의 말에 울림이 있습니다.
9일에는 22개 서울 자사고 중 올해 운영성과 평가 대상인 13개교에 대한 평가 결과가 발표됐습니다. 경희고 배재고 세화고 숭문고 신일고 이화여대부고 중앙고 한양대부고 등 8곳의 지정 취소가 결정됐습니다. 자사고가 고교 다양화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입시 위주의 교육에 매몰됐다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조선이 서원의 순기능을 외면하고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켜 도려냈듯이 혹시 우리 사회가 사학의 다양한 프로그램과 선도적 교육 실험을 외면하고 공교육 붕괴의 원죄라는 프레임을 덧씌우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요.
1980년대 시작된 고교 평준화는 강남 8학군과 조기 유학 열풍이라는 폐해를 낳았습니다. 그걸 잠재운 것이 자사고와 특목고입니다. 그간 자사고는 평준화의 부작용을 보완하며 미래 인재를 양성해 왔습니다. 자사고가 처음 문을 연 것은 교육의 다양성과 수요자의 선택권을 확대하라는 요구에 부응한 김대중 정부였습니다. 이명박 정부에서는 더욱 확대됐으니 진보와 보수의 차이보다는 시류에 따라 동요하는 것 같습니다.
자사고 폐지로 강남 8학군 현상과 조기 유학 열풍이 재연되면 새로운 특권층이 형성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서원이 조선의 재정 확충을 위해 철폐된 데 비해 작금의 자사고 폐지는 국가 재정 수천억 원이 추가로 드는 길로 가고 있습니다. 차라리 그 돈을 일반고 교육 여건 개선에 쓰는 것이 합리적일지 모릅니다. 과연 미래 인재 양성의 백년지대계를 위해 어떤 수를 두는 것이 정석(定石)일까요.
박인호 용인한국외대부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