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전세 3000만 원짜리 반지하방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한 남자 A 씨는 영화 ‘기생충’(5월 개봉)을 보고 봉준호 감독의 탁월한 ‘계급감성’에 놀랐다. 부자와 빈자로 일도양단해 계급 간 분열과 갈등을 단순무식하게 보여주는 대개의 영화와 달리, 이 영화는 언덕 높은 곳 궁전 같은 주택에 사는 부자, 햇빛이 겨우 드는 반지하방에 사는 빈자에 더하여, 아예 창문조차 없는 ‘진짜 지하’에 사는 극빈자를 깜짝 등장시킨다. 이를 통해 ‘가난한 자와 더 가난한 자와 더 더 가난한 자’의 밥그릇 싸움도 장난이 아님을 은유하는 것이다. 그렇다. 세상은 단순하지 않다. 강남이라고 부자인가. 테북(테헤란로 이북)과 테남(테헤란로 이남)이 다르고, 요즘엔 양북(양재천 이북)과 양남(양재천 이남)으로 또 나누는 게 트렌드다. 이게 무슨 미친 말이냐 하면, 인류가 존재하는 한 100% 평등할 순 없으며 모든 계급 간 차이와 불화는 피할 수 없단 얘기다.
A 씨는 옆집이 부러웠다. 같은 반지하방이라도 땅 바로 위에 창이 있어 폭우만 오면 창틀로 빗물이 이과수폭포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자기 집에 비하면 전세금 500만원 더 비싼 옆집은 차라리 ‘드림 하우스’였다. 경사진 길 다른 쪽에 위치한 옆집은 요술공주 세리를 닮은 새댁이 캡틴 아메리카를 닮은 남편과 살았는데, 창문이 지표면에서 50㎝쯤 높이 있어 내리는 비를 낭만적으로 즐길 수 있었고, 발이 60개쯤 달린 괴물 같은 벌레도 들어오는 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 반지하방도 등급이 있고 계급이 있다.
[2]아버지에게 학대 받고 자란 남자 B 씨는 영국의 음악천재 엘튼 존의 성장사와 예술세계를 담은 영화 ‘로켓맨’(6월 개봉)을 보고 엘튼 존에 대해 무척 실망하였다. 엄격하고 마초적이어서 자신을 한 번도 살갑게 안아주지 않았던 군인 아버지 밑에서 성장한 엘튼 존. 그의 내면에 사무친 애정결핍이 트라우마의 씨앗이 되어 종국엔 예술세계로 꽃핀다고 영화는 묘사한다. 아, 이건 말도 안 된다. 1950년대에 시도 때도 없이 아들을 안아주고 뽀뽀해주고 쓰다듬어주는 아버지가 얼마나 되었겠느냔 말이다. ‘이건 배부른 자기연민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 B 씨는 겨우 이 정도의 상처를 가지고 예술세계의 무슨 대단한 촉발점인 양 침소봉대하는 엘튼 존의 음악세계가 외려 종잇장처럼 얇아 보이기 시작하였다. 물론 요즘 트라우마란 단어는 공황장애, 조현병과 더불어 3대 유행어로 꼽힐 만큼 툭하면 핑계거리로 등장하지만, ‘아버지로 인한 트라우마라면 나 정도는 돼야 명함을 내밀지 않을까’ 하는 것이 B 씨의 생각이다.
B 씨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중간고사 기말고사에서 연이어 전교 1등을 해도 ‘틀린 문제의 개수만큼’ 아버지에게 혁대로 얻어맞고 살았던 비운의 인물이다.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1등보단 완벽함을 추구하라”고. 초등학교 땐 만취해 팬티만 입고 들어온 아버지가 B 씨를 술집여자로 착각해 “사랑한다”며 껴안고 입을 맞추며 혀를 들이민 적도 있었다. 으흠. 이 정도는 되어야 트라우마다. 하지만 B 씨는 이런 경쟁력 넘치는 트라우마를 지니고도 예술적 감성이 전혀 없었고, 지금은 대기업 월급쟁이다.
[3]한강지류 산책길을 걷다 반대편에서 공유 킥보드처럼 미친 듯이 달려온 개한테 물린 뒤 성질이 미친놈처럼 바뀌었다고 생각하는 남자 C 씨는 미남배우 키아누 리브스가 은퇴한 킬러로 나오는 영화 ‘존 윅’의 세 번째 시리즈 ‘존 윅 3: 파라벨룸’(6월 개봉)을 보고 짐승처럼 분개하였다. 킬러들의 세계를 그린 이 영화에는 살인이 절대 금지된 킬러들의 성역인 뉴욕 콘티넨탈 호텔에서 자신을 공격해오는 적들을 부득이하게 처단한 주인공 존 윅이 킬러세계의 최고회의(영어로는 ‘High Table’)에 의해 파문돼 수많은 킬러들의 공격에 직면한다는 내용이다. 킬러들에게 무슨 ‘성역’이 있고 ‘룰’이 있고 ‘최고회의’가 있고 ‘파문’씩이나 있겠느냐만, C 씨가 화난 것은 자신에게 덤비는 킬러 85명을 무슨 벼룩 한 마리 찍 눌러 죽이듯 손쉽고 창조적으로 살해하는 주인공의 자기합리화 때문이었다. 은퇴한 존 윅이 살인을 재개한 까닭은 단지 사랑하는 아내가 병으로 숨지기 전 ‘사랑의 징표’로 남긴 반려견을 놈들이 죽였기 때문인 것이다. 개 한 마리 때문에 세 편의 시리즈를 통틀어 290명의 킬러를 죽이는 그의 연쇄살인엔 무슨 정당성이 있겠느냔 말이다.
더욱 기막힌 일은 존 윅이 최고회의에 저항하면서 “난 꼭 살아야 한다”고 외치는 이유이다. 존 윅에 따르면 “나는 아내와의 소중한 사랑을 간직한 존재이므로 살아서 사랑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와우! 난 소중한 존재이므로, 누군가의 아들이고 아빠이고 오빠이고 삼촌이고 연인일지도 모를 킬러 수백 명을 죽여도 된다니. 철학과 출신인 C 씨는 존 윅의 유별난 동물사랑과 불학무식한 살인행위를 ‘인류의 나아갈 길이 개인의 자아 완성과 자유 신장에 있다’고 설파한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에 입각해 해석해야 할지를 두고 근원적 카오스에 빠지고 말았다.
이승재 영화칼럼니스트·동아이지에듀 상무 sjda@donga.c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