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생충’.
A 씨는 옆집이 부러웠다. 같은 반지하방이라도 땅 바로 위에 창이 있어 폭우만 오면 창틀로 빗물이 이구아수 폭포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자기 집에 비하면 전세금 500만 원 더 비싼 옆집은 ‘드림 하우스’였다. 경사진 길 다른 쪽에 위치한 옆집은 요술공주 세리를 닮은 새댁이 캡틴 아메리카를 닮은 남편과 살았는데, 창문이 지표면에서 50cm쯤 높이 있어 내리는 비를 낭만적으로 즐길 수 있었고, 발이 60개쯤 달린 괴물 같은 벌레도 들어오는 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 반지하방도 계급이 있다.
[2] 아버지에게 학대 받고 자란 남자 B 씨는 영국의 음악천재 엘턴 존의 성장사를 담은 영화 ‘로켓맨’(6월 개봉)을 보고 엘턴 존의 예술세계가 돌연 종잇장처럼 얇아 보이기 시작하였다. 엄격하고 마초적이어서 자신을 한 번도 살갑게 안아주지 않았던 군인 아버지 밑에서 성장한 엘턴 존. 그의 내면에 사무친 애정결핍이 트라우마가 되어 종국엔 예술세계로 꽃핀다고 영화는 말한다. 아, 이건 말도 안 된다. 1950년대에 시도 때도 없이 아들을 안아주고 뽀뽀해 주고 쓰다듬어 주는 군인 아버지가 얼마나 되겠느냔 말이다. 배부른 자기연민. B 씨는 ‘아버지로 인한 트라우마라면 나 정도는 돼야 명함을 내밀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였다.
[3] 한강지류 산책길을 걷다 미친 듯이 달려온 개한테 물렸던 재수 없는 경험을 가진 남자 C 씨는 키아누 리브스가 킬러로 나오는 영화 ‘존 윅’의 세 번째 시리즈 ‘존 윅 3: 파라벨 룸’(6월 개봉)을 보고 짐승처럼 분개하였다. 킬러들의 세계를 그린 이 영화는 살인이 절대 금지된 킬러들의 성역인 뉴욕 콘티넨털 호텔에서 살인을 저지른 존 윅이 킬러 세계의 최고회의(영어로는 ‘High Table’)에 의해 파문돼 수많은 킬러들의 공격에 직면한다는 내용이다. 킬러들에게 무슨 ‘성역’이 있고 ‘최고회의’가 있고 ‘파문’씩이나 있겠느냐만, C 씨가 화난 것은 킬러 85명을 무슨 책벌레 찍 눌러 죽이듯 손쉽고 창조적으로 살해하는 주인공의 자기합리화 때문이었다. 은퇴한 존 윅이 살인을 재개한 까닭은 단지 사랑하는 아내가 병으로 숨지기 전 ‘사랑의 징표’로 남긴 반려견을 놈들이 죽였기 때문인 것이다. 개 한 마리 때문에 세 편의 시리즈를 통틀어 290명의 킬러를 죽이는 그의 연쇄살인에 무슨 정당성이 있겠느냔 말이다.
더욱 기막힌 일은 존 윅이 최고회의에 저항하면서 “난 꼭 살아야 한다”고 외치는 이유이다. 그에 따르면 “나는 아내와의 소중한 사랑을 간직한 존재이므로 살아서 사랑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와우! 난 소중한 존재이므로, 누군가의 아들이고 아빠이고 연인일지도 모를 킬러 수백 명을 죽여도 된다니. 철학과 출신인 C 씨는 존 윅의 유별난 동물 사랑과 더불어 이기적이고 불학무식한 살인행위를 ‘인류의 나아갈 길이 개인의 자아 완성과 자유 신장에 있다’고 설파한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에 입각해 해석해야 할지를 두고 근원적 카오스에 빠지고 말았다.
이승재 영화 칼럼니스트·동아이지에듀 상무 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