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3·1운동 임정 100년, 2020 동아일보 창간 100년]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2부 <제64화> 전북 정읍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전북 정읍시 태인면에서 개최된 3·1운동 재현 행사. 1000여 명의 태인 주민이 참석한 가운데 당시를 재현하는 퍼포먼스와 독립선언서 낭독 등 다양한 행사가 진행됐다. 정읍시청 제공
1919년 2월 말 중앙학교 교장 송진우는 고종 황제 국상에 참여하기 위해 경성에 도착한 박지선, 김현곤, 송수연 등 전북 정읍군(현 정읍시) 태인면 출신 청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고하 송진우는 3·1만세운동 거사계획을 넌지시 알리며 정읍지역에서도 궐기할 것을 당부했다. 세 사람은 인촌 김성수 등 경성에 거주하는 호남 출신 인사들을 만나며 거사의 중요성을 깨달은 뒤 즉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 등을 구해 태인으로 돌아갔다.(박지선의 생전 회고 ‘송진우 선생과 15인회’, 신동아 1965년 3월호)
이들은 고향에 도착한 즉시 항일독립만세운동을 목적으로 비밀결사조직 ‘15인회’를 조직했다. 회장 김현곤, 총무 박지선 등 전원 태인면 청년들로 구성된 이 조직은 태인 3·1만세운동을 주도해나갔다.
5일 이곳을 참배한 정읍역사문화연구소 김재영 이사장은 “올해를 ‘정읍 방문의 해’로 삼은 정읍시에선 3·1운동 100주년 열기가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고 소개했다. 3월 1일엔 1000여 명의 정읍시민이 위패봉안소에 모여 만세운동 기념 행사를 가졌고, 정읍시립박물관에서는 ‘정읍의 함성, 대한독립 만세’를 주제로 기획전(6월 22일∼8월 21일)이 진행 중이다. 기자가 묵은 정읍고택문화체험관에서도 태인 출신 기생 김옥진(소란)의 항일운동을 다룬 음악무용극이 밤늦게까지 공연돼 관객 80여 명으로부터 큰 갈채를 받았다. 마치 100년 전 태인 만세운동을 실제로 경험하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너는 왜놈의 개냐?”
1919년 음력 2월 보름(양력 3월 16일)에 거행된 태인 3·1만세운동의 준비 과정은 치밀했다. 15인회 회원들은 지역 유지인 김달곤의 집을 거점 삼아 밤마다 촌락들을 돌아다니며 만세운동 참가자들을 모았다. 그 결과 20, 30대의 청년 50여 명이 뜻을 함께하기로 했다.(‘송진우 선생과 15인회’)
15인회 회장이자 태인면사무소 서기인 김현곤은 몰래 면사무소의 등사판을 가져와 회원 송한용의 집에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 수천 장을 찍었다. 총무를 맡은 박지선은 각 지역 동지들에게 인쇄물을 전달하는 한편 일본 헌병들의 동태 파악에 힘썼다.
태인의 주산 성황산 남쪽에 위치한 ‘태인 3·1운동 기념탑’(1984년 3월 1일 건립)과 위패봉안소(뒤·2003년 조성). 매년 이곳에서 3·1절 기념 행 사 및 참배의식이 거행된다. 정읍=안영배 논설위원 ojong@donga.com
삽시간에 수천 명 수준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일제 관공서로 몰려가 만세를 불렀다. 기습 시위에 놀란 일본 주재소(현 태인파출소 자리) 헌병들은 주재소 안에서 공포(空砲)만 쏘아댔다. 이때 조선인 헌병 보조원들이 박지선 등 시위대를 폭행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성난 군중이 “너는 조선 사람이 아니고 왜놈의 개냐?”고 비난하며 거세게 대항했다. 이 과정에서 김현곤, 송진상 등 15인회 청년 5명이 체포됐다.(‘태인지’)
일경의 진압에도 시위대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날이 어두워지자 시위대는 태인읍을 둘러싸고 있는 성황산과 항가산 등에 올라 봉화를 올린 뒤 다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일경이 쫓아오면 산을 옮겨 다니며 시위를 계속했다. 이날 태인읍의 산마루는 밤새 횃불이 꺼질 줄 몰랐다.
산마루의 횃불은 신호가 돼 민가에서도 일제히 만세를 불렀다. 일부는 “왜놈들아 물러가라”고 외치며 석유로 적신 솜방망이에 불을 붙여 주재소로 던지기도 했다. 격렬했던 태인의 만세운동은 이튿날인 17일 새벽 수백 명으로 증원된 일본 군경에 의해 15인회 전원이 체포되면서 일단락됐다.
○꺼질 줄 모르는 봉화
정읍군 읍내에서도 태인면과 별개로 천도교인과 기독교인들이 함께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있었지만 쉽게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읍내에는 헌병 분대와 검사국 등 일제 통치기관이 자리 잡고 있는 데다 일본인 밀집 주거지가 있어 일경이나 밀정에게 포착되기 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3월 16일 발생한 태인 만세운동과 시위 주도 인물들이 체포돼 헌병 분대로 개처럼 끌려오는 모습에 크게 자극받기 시작했다.(김재영, ‘한국민족운동사와 정읍’)
마침내 지역 유지인 이익겸, 박환규 등은 3월 23일 장날에 만세 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천도교인들과 기독교인들은 전도 형식을 빌려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시위 참여를 권유했고, 부인들도 이에 적극 호응했다.
순조롭게 준비된 거사는 계획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거사 전날인 22일 밤, 일본인 소학교 교사의 밀고로 주동자 두 사람이 체포된 탓이다. 일본 헌병대는 백로지(갱지)에 청색과 홍색 염료로 태극기를 제작하던 현장을 급습했다. 거사일인 23일 시장에 모인 군중 100여 명은 맨손으로 독립만세만 외쳤을 뿐 시가행진도 못한 채 해산했다. 그 와중에도 덕천면의 송기룡과 박재구, 읍내의 도상철과 박근수 등 애국지사들은 4월 2일 장날을 맞아 다시 만세운동을 전개하며 항일운동을 계속했다.
○손바닥에 못을 박는 고문
1919년 3월에서 5월까지 정읍군에서 일어난 만세운동 시위는 31회에 걸쳐 1만8000명이 참여한 것으로 집계됐다. 특히 치열했던 태인 만세운동에는 일제 헌병과 경찰에 검속된 군중만 80여 명이고, 이 가운데 정읍검사국에 송치된 사람도 25명에 달했다.(‘태인지’)
태인의 주산 성황산 남쪽에 위치한 ‘태인 3·1운동 기념탑’(1984년 3월 1일 건립)과 위패봉안소(뒤·2003년 조성). 매년 이곳에서 3·1절 기념 행사 및 참배의식이 거행된다. 정읍=안영배 논설위원 ojong@donga.com
이들은 선고받기 전까지 견디기 힘든 고문을 받았다. 일경은 특히 15인회 총무를 맡았던 박지선에게 조직 및 연락책을 실토하라며 악행을 가했다. 박지선의 두 손바닥에 일주일간 못을 박아두고, 심지어 성기에 못을 집어넣기도 했다. 박지선은 죽기를 각오하고 고문을 버티며 참가자 이름을 함구했지만 그 대가로 자손을 낳을 수 없는 불구자가 됐다. 송한용 역시 손가락을 불로 지지는 고문을 당했다. 형을 살지 않았지만 함께 체포된 애국지사 부인들도 고문을 피하지 못했다. 박지선의 아내는 뺨을 맞다 이가 다 빠졌고, 송한용의 아내는 골병이 들어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광복 직후 사망했다.(‘송진우 선생과 15인회’)
태인의 애국지사들은 6개월 내지 1년 반의 옥고를 치른 뒤에도 독립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요시찰 대상자가 된 이들은 단 10리(4km)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고, 신고 없이 이동하다 발각되면 곤장치레를 당해야만 했다. 하지만 김현곤, 박지선, 송한용 등은 옥고로 상한 몸을 이끌고 밤마다 정읍지역 동지들을 찾아다니며 독립군에 건넬 군자금을 모았고, 7000원(당시 쌀 한 가마니 값 3∼5원)의 거금을 상해임시정부 파견원(국창현)에게 전달했다. 훗날 박지선은 자신들이 보낸 자금이 이청천 장군에게 전달됐다는 얘기를 듣고 한없이 기뻐했다고 술회했다.
▼ “백범선생, 정확히 이집에 오셨어… 회의하고 주무셨다고” ▼
독립운동가 김부곤 지사의 사위
‘상해임정이 정읍에 큰빚 졌다’… ‘백범발언-정읍방문’ 생생 증언
‘상해임정이 정읍에 큰빚 졌다’… ‘백범발언-정읍방문’ 생생 증언
광복 직후 백범 김구가 찾아와 머문 애국지사 김부곤의 자택. 이곳에서 살고 있는 딸 김금숙 씨(아래쪽 사진 왼쪽)와 사위 곽규 씨. 정읍역사문화연구소 제공
정읍시 태인면 태흥리 오리마을에 위치한 독립운동가 김부곤의 자택에서 사위인 곽규 씨(89)는 백범의 정읍 방문은 사실이라고 밝혔다. 그동안 진위를 놓고 논란이 됐던 백범의 정읍 방문과 “상해 임정이 정읍에 큰 빚을 졌다”는 백범의 발언이 사실로 확인된 셈이다. 한국 종교사를 연구해 온 안후상 박사도 “김제 출신의 고승 탄허 스님(1913∼1983)에 의하면 백범이 정읍을 방문하면서 그렇게 말했다”고 밝혀 백범의 정읍 방문이 실제 있었던 일임을 뒷받침했다.
임정이 정읍에 큰 빚을 졌다는 발언에는 근거가 있다. 3·1만세운동 후 출범한 상해임시정부는 부족한 군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국내외 각지로 연락원들을 파견했다. 그 결과 전국 각지에서 군자금을 지원받았는데 정읍 지역에서 특히 많은 군자금을 모아 보내줬다.
백범이 직접 찾은 김부곤 지사는 태인 3·1만세운동에 참여한 이후 군자금을 모아 보내는 데 주력했다. 김 지사는 태인의 제일 부자 김재일 등 부호들로부터 자금을 거둬 임정에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영원면의 부호 라홍균은 한 번에 거액인 1000원을 희사하기도 했다(‘송진우 선생과 15인회’).
정읍 지역의 종교단체들도 군자금 지원에 힘을 보탰다. 안후상 박사는 “정읍에 본부를 둔 민족종교인 보천교는 특히 많은 군자금을 보낸 것으로 확인된다”고 말했다. 3·1운동 민족대표 48인으로 활약한 임규(보천교 간부)는 보천교에서 5만 원을 받아 라용균(도쿄 2·8독립선언 참여, 상해 임시의정원 의원)을 통해 임정에 전달했다(‘전북인물지’). 보천교가 만주에서 무장 항일투쟁을 벌이던 김좌진 장군에게 5만여 원을 지원한 정황이 담긴 일제 정보기관(관동청 경무국·關東廳 警務局) 보고서가 최근 발견되기도 했다.
정읍=안영배 논설위원 oj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