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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대정전[횡설수설/전성철]

입력 | 2019-07-16 03:00:00


1977년 7월 13일 허드슨강 인근의 한 변전소에 벼락이 떨어지며 일어난 대(大)정전(Blackout) 사태는 뉴욕 시민들에게 잊기 힘든 악몽이다. 대부분 상점이 문을 닫은 직후인 오후 8시 37분 정전이 발생하자, 뉴욕은 순식간에 무법천지로 변했다. 이튿날 전기가 복구될 때까지 25시간 동안 1616곳의 상점이 약탈을 당했고 방화가 이어지며 1037건의 화재가 일어났다. 하룻밤 새 각종 범죄로 체포된 사람만 3776명, 다친 경찰관도 550명이나 됐다.

▷뉴욕 대정전이 남긴 것이 3억 달러 규모의 경제적 피해가 전부는 아니다. 브롱크스 지역에서 태동하던 힙합 문화가 급성장하는 데 대정전은 결정적 역할을 했다. 빈민가 젊은이들은 불이 꺼진 상점으로 달려가 평소 갖고 싶었던 믹서와 턴테이블 등 고가의 음악 장비들을 훔쳤다. 뉴욕의 한 방송 진행자는 “(대정전) 다음 날 수천 명의 새로운 DJ가 생겨났다”고 했다. 미국 드라마 영화 게임 등 대중문화에서 정전이 자주 소재로 등장하는 것도 뉴욕 대정전의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보여준다.

▷대정전이 일어난 지 정확히 42년 만인 13일 오후 6시 37분경 기계적 결함이 원인인 것으로 보이는 변전소 폭발 사고로 뉴욕 맨해튼 미드타운과 어퍼웨스트사이드 일대에 대규모 정전이 발생했다. 지하철이 멈춰서고 뉴욕의 명물인 타임스스퀘어의 광고판이 꺼졌다. ‘라이온킹’, ‘오페라의 유령’ 등 뮤지컬 공연과 인기 가수 제니퍼 로페즈의 콘서트도 취소됐다. 하지만 이번엔 ‘공포의 밤’이라고 불렸던 1977년 그날과는 사뭇 달랐다. 신호등이 꺼진 혼잡한 교차로에서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나서 수신호로 교통 통제를 했다. 뉴욕 카네기홀의 연주자들과 뮤지컬 ‘웨이트리스’ 팀 등은 거리로 나와 시민들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즉석공연을 펼쳤다. 그 덕분에 세계 각지에서 온 관광객들은 불 꺼진 거리에서 ‘깜짝 선물’을 받았다.

▷늦더위가 기승을 부렸던 2011년 9월 15일의 정전 사태 정도를 제외하면, 한국은 최근 10여 년간 큰 정전 사고를 거의 겪지 않은 드문 나라다. 세계적 정보통신 기업들이 앞다퉈 우리나라에 데이터센터를 짓는 것도 뛰어난 전력 인프라와 싼 전기요금 때문이다. 전기가 끊기는 일이 드물다 보니 전기가 없는 삶을 상상하는 일이 쉽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별다른 준비가 없는 상태에서 정전이 닥칠 경우 끔찍한 재앙이 될 수 있다. 에어컨 사용이 늘며 전력 가뭄이 극심해지는 계절, 조금의 방심도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전성철 논설위원 daw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