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외압설 방어하려다 보도 신뢰 깎아내리는 우 범해
서정보 문화부장
그런데 사흘 뒤인 21일 윤도한 대통령국민소통수석은 출입기자들을 상대로 한 브리핑에서 “해당 프로그램에 대해 (KBS에) 정정보도를 요청했는데 사흘째 아무 반응이 없다”며 강한 어조로 비판했다. 그러자 청와대 외압 논란이 일면서 과연 청와대가 누구에게 어떻게 ‘즉각 시정조치’를 요청했는지가 핵심 논란거리로 떠올랐다. 방영 다음 날인 19일 KBS에선 과연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시사기획 창’의 진행자이자 데스크인 시사제작국장이 사내 게시판에 올린 장문의 글과 이후 열린 보도위원회, 공정보도위원회 등에서 나온 사측의 얘기를 종합하면 이렇다.
이들 해명에 따르면 청와대 외압은 없었고, 출입기자를 통해 요구한 것이 전부라는 것이다. KBS의 공식 입장도 여기에 근거하고 있다. 하지만 사내 게시판은 들끓었다. 전직 간부들은 출입기자 말고 다른 루트를 통해 정정보도를 요청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글을 올렸고, 세월호 사건 때 당시 이정현 청와대 수석의 보도 자제 요청에 대한 통화 녹음을 공개했던 김시곤 전 보도국장 역시 “윤 수석이 직접 정정보도와 사과방송을 요구했다면 방송법 위반”이라고 비판했다.
청와대는 언론중재위원회 등에 가기 전에 정정보도를 먼저 공식 요청했다고 강조하면서도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어떻게 전달했는지 뚜렷하게 밝히지 않고 있다. 결국 이로 인해 외압설은 끊이지 않고 제기되고 있다. 외압설의 진실게임은 쉬이 결론이 나올 수 없다. 검찰 수사로 KBS 고위 인사들의 통화 기록을 다 살펴보거나 요청받은 사람이 고백하지 않는 한 서로의 주장만 오갈 뿐이다.
그런데 버선목 뒤집듯 알 수 없는 진실공방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KBS가 외압설을 부인하기 위해 보도의 신뢰성을 깎아내리는 방식을 택했다는 것이다.
사측의 해명을 그대로 인정한다면 시사제작국장은 직접 진행을 맡은 프로그램의 심각한 오류를 사전에 전혀 잡지 못하고, 방영 후에야 부랴부랴 취재 과정을 되짚어보면서 기자의 취재가 부실했다는 점을 인식했다. 22일 예정된 재방을 긴급 취소할 정도로 부실한 취재였는데 데스크 기능이 전혀 발휘되지 않은 것이다. 취재 기자는 핵심 팩트에 대한 검증을 전혀 하지 않고 여러 차례 말 바꾸기를 한 기자가 돼버렸다.
물론 취재가 부실했을 수 있다. 하지만 KBS 내부의 엄중한 조사를 통해 진상을 밝히고 사과한 뒤 취재 및 데스크 과정을 재점검하는 식으로 풀어야지 마치 ‘외압은 없고, 모든 것은 부실 취재 탓’이라고 떠넘긴다면 KBS 보도의 신뢰성은 더 추락할 뿐이다. 그렇지 않아도 메인 뉴스인 KBS9 시청률이 10% 미만으로 떨어져 10년 전에 비해 반 토막 나고 손혜원 의원, 윤지오 씨 등을 스튜디오로 불러 일방적 입장을 여과 없이 들려주는 등 KBS 보도의 신뢰에 우려하는 시선이 많다.
외압설이라는 당장의 불을 끄기 위해 신뢰라는 큰 자산을 잃는다면 수신료를 재원으로 삼는 공영방송은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서정보 문화부장 suhcho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