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보 30돌 ‘3대 적신호’ ① 보장확대 과속… 급속 고령화로 재정악화 우려 ② 의료계 피해 의식… 수가 통제로 의사들 반발 확산 ③ 병원 양극화… 종합병원 북적, 동네병원 텅텅
16일 연세대 신촌 세브란스병원의 외래진료실 앞이 환자와 보호자들로 북적이고 있다(오른쪽 사진). 문재인 대통령이 1일 보험 적용 분야를 더욱 확대하겠다고 밝히자 다음 날 대한의사협회가 청와대 앞에서 진찰료 인상 등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고 항의했다. 대한의사협회 제공·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구자룡 논설위원
건강보험 가입이 법적으로 의무화되기 전인 1968년 ‘한국의 슈바이처’로도 불린 장기려 박사(1911∼1995)가 설립한 국내 1호 의료보험 ‘부산청십자 조합’의 모토다. 법적인 의무가 없다가 1977년 500인 사업장부터 시작된 뒤 1989년 7월 전 국민 건강보험으로 확대되기 한 해 전까지도 가입률은 35%에 불과했다.
그후 30년, 한국의 건보는 ‘동남아 국가가 수입해 가고, 오바마 대통령이 부러워한다’는 말을 들을 만큼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 들어 보험 적용 분야를 획기적으로 늘려 ‘의학적으로 필요한 모든 치료에 보험 적용을 확대하겠다’고 밝히자 의료계가 반발하면서 홍역을 앓고 있다. 의료계는 진료비나 수술 수가 인상 등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9, 10월 13만 의사가 총파업을 벌이겠다며 맞서고 있다. 건보가 어떤 복병을 만난 걸까.
건강보험이 없던 시절 진료 및 검사 가격은 의사와 병원이 임의로 결정했다. 병원 문턱이 높아 아파도 못 가거나 안 가던 환자도 많았다. 의약분업 전이라 의사 처방 없이 약국에서 약을 구입하는 것은 물론 주사도 맞고 심지어 상처를 몇 바늘씩 꿰매는 수술도 받았다.
보험이 귀하던 시절 1980년대 초 동아일보에는 의료보험증에 대한 독자 투고가 종종 등장했다. 분실 신고를 했는데 1개월간은 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다고 한다며 개선해 달라거나 기차에서 가방을 분실했는데 의료보험증만은 꼭 돌려달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의료보험증이 있는 직장을 다니거나 공무원을 부러워하던 시절이다.
도시와 농촌, 직장과 지역을 가리지 않고 ‘전 국민 개(皆)보험’이 시행되자 환자들의 의료 수요가 크게 늘었다. 특히 대형 종합병원 대학병원으로 환자가 몰려 ‘3시간 대기에 3분 진료’가 불편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최근 조사에서도 국민 1인당 1년 외래 진료 횟수가 한국 17회로 일본 12회, 독일 10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6.9회보다 월등히 많다.
병원 문턱을 낮추고 보다 나은 진료에 대한 갈증을 푸는 데 건보는 많은 기여를 했다. 하지만 종합병원으로 쏠리고 동네 병원 환자가 줄어드는 ‘의료 양극화’는 건보 이후 고질적인 문제가 됐다.
○ 수가조정 필요하지만 의료계의 ‘피해의식’은 문제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이 최근 앞으로 남은 임기 3년 동안 보험 적용을 더욱 확대하겠다고 밝히자 의료계는 파업까지 꺼내들었다. 이에 비추어 보면 건보 도입 당시 모든 의료기관을 수가로 통제하는 건보 시행에 큰 혼란이 없었던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전 국민 건보’는 어떻게 이뤄졌나. 건보 첫 시행 이후 12년 만에 전 국민 건보가 정착된 데는 박정희 대통령 때 시작돼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 때 마무리된 시대적 배경도 영향을 미쳤다. 한 전문가는 “당시는 의료계뿐 아니라 모든 부문에서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통제되던 사회였다. 정부가 의료계를 억누르고 건보를 도입해 국민의 의료보장에 기여했다”고 말했다.
1980년대 보험 수가를 경제기획원 등 재정 당국에서 물가 관리 차원에서 통제한 것도 의료계의 수가 인상 요구가 충분히 반영되지 못하게 했다. 건보 적용이 점진적으로 확대돼 의료계에 미치는 영향과 저항을 분산시켰다.
그렇다고 의료계는 건보 제도의 피해자이기만 한가. 권순만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건보 도입으로 의료 시장도 커졌다”며 “의료계가 일방적인 피해자인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의사들의 반대로 의대 정원을 늘리지 못하고 있는 것을 큰 문제로 지적한다. 정형선 연세대 보건행정학과 교수는 “인구 1000명당 의사(한의사 포함) 수는 한국이 2.2명, 선진국 3.4명, 간호사는 한국 5.6명으로 선진국의 9.0명에 비해 적다”며 대표적인 의료계 이기주의로 지목했다. 이에 대해 박종혁 의협 홍보이사는 “인구가 줄어들어 지금 의대 정원을 늘리면 10여 년 후에는 공급 과잉 상태가 될 것”이라며 “수술 수가가 적어 외과 지원자가 없는 등 불합리한 수가 조정이 더 문제”라고 말했다.
‘노동집약적인 노동을 하는’ 의사들의 진찰료나 일부 외과 수술 수가가 지나치게 낮아 조정할 필요가 있다는 데는 많은 전문가의 의견이 일치한다. 의사들이 외과를 기피해 ‘수술 절벽’이 올 것이라는 경고도 나온다. 다만 이때도 컴퓨터단층촬영(CT)이나 자기공명영상(MRI) 촬영 등 검사료도 함께 조정되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의료계가 주장하는 불합리한 수가에 의한 ‘피해 의식’에 거품이 없는지 세심히 볼 필요가 있다.
○ ‘의료 포퓰리즘’ 지적 이유 있는 ‘문재인 케어’
상당수 보건 전문가는 고령화 속도가 빨라져 의료비가 급증하는데 보장성 강화가 과속하면 건보 재정을 거덜 내고 보험료 인상 폭탄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경고를 보냈다. 당장 7년간 흑자 행진을 하던 건보가 지난해 8년 만에 적자(적자액 3조8954억 원)가 났고 올해도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런 추세라면 현재 20조 원가량인 건보적립금(누적 흑자)도 크게 줄어 문 정부가 끝나기 전 절반 이하로 줄어들 수 있다. 건보 재정 악화 폭탄을 뒤로 돌려 생색만 내는 ‘의료 포퓰리즘’이라는 의료계 비판도 무리가 아니다. 정부가 2% 아래였던 보험료 인상률을 3.49%로 대폭 올리겠다고 한 것도 의료 재정 악화를 예견했기 때문이다.
어느 정부나 건보 혜택 확대로 환심을 사는 정책을 폈다. 다만 건보 재정은 세금(법정 한도 건보 수입의 20%) 지원 없이는 유지되기 어렵다. 무턱대고 보험 혜택을 늘릴 수 없는 이유다. 따라서 합리적인 대책 없이 적립금을 털고 건보료를 올려 보험 혜택을 늘리는 것은 눈 가리고 아웅이다.
고령화와 소득 증가 등으로 국내 의료비는 매년 9% 증가하고 있다. 환자들은 보험 적용 대상이 늘어나 병원 창구에서 내는 진료비가 줄어들면 당장 부담이 줄어들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보험료 인상이나 재정 지원 증가로 메워지면 ‘윗돌 빼서 아랫돌 괴는’ 식이 될 수 있다는 점도 인식해야 한다.
의료서비스는 ‘사치재’가 아닌 건강과 생명을 담보로 한 필수재다. 의료서비스를 운영하는 건보는 보험이면서 국가가 제공하는 공공재이기도 하다. 정부와 의료계, 이용자가 제 이익 찾기에만 골몰하면 유지될 수 없는 사회보장 장치다. ‘보장 확대 과속’ ‘지나친 피해 의식’ ‘대형병원 쏠림으로 인한 의료 양극화’가 30돌을 맞은 건보의 3대 건강 적신호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구자룡 논설위원 bon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