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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룸 귀갓길 범죄 느는데… 공동현관 벽에 적힌 비밀번호 또렷

입력 | 2019-07-18 03:00:00

서울 원룸촌 경찰과 돌아보니




16일 오후 서울 관악구 신림동의 한 원룸촌에서 관악경찰서 경찰관이 현관문의 ‘안심거울’ 부착 상태를 점검하고 있다. 안심거울은 뒤에서 쫓아오는 사람이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붙여놓았다. 작은 사진은 건물로 들어가는 현관문 비밀번호(점선 안)가 노출돼 있는 한 원룸건물 입구.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이걸 또 적어 놨네.”

16일 오후 서울 관악구 신림동의 한 원룸촌. 이곳에 원룸 건물을 갖고 있는 A 씨가 말했다. 건물 현관문 도어록 바로 아래에 현관문 비밀번호 네 자리가 적혀 있는 걸 본 것이다. 순찰을 돌던 경찰이 비밀번호가 적혀 있는 것을 발견해 A 씨에게 알렸다. A 씨는 지우개로 비밀번호를 지웠다. A 씨는 “이렇게 적혀 있는 비밀번호를 지운 게 지금까지 20번도 넘는 것 같다”며 한숨을 쉬었다. A 씨는 현관문 바로 안쪽에 늘 지우개 2개를 놓아 둔다고 했다. 도어록 아래뿐 아니라 A 씨의 건물 외벽 곳곳에는 비밀번호를 매직으로 덧칠해 가린 흔적이 있었다.

관악경찰서 관내에서는 최근 혼자 사는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가 잇따랐다. 이날 본보 취재팀이 관악서의 관내 방범시설 진단 현장에 동행한 결과 주거 침입 범죄에 취약한 곳이 많았다. A 씨 건물 외에도 현관문 비밀번호가 노출돼 있는 건물이 많았다. 한 건물은 현관문 옆 우체통 위에 비밀번호 다섯 자리가 또렷하게 적혀 있었다. 건물주는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비밀번호는 택배기사나 음식점 배달원들이 적어 놓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물건을 주문한 가구에서 비밀번호를 한 번 알려주면 건물 도어록 아래 등에 적어 두고 드나들 때마다 사용한다는 것이다. 원룸 건물에는 배달 물건을 대신 받아줄 경비원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혼자 사는 여성들은 불안해했다. 관악구 신림동에서 5년째 혼자 살고 있는 유효정 씨(24·여)는 “신림동에서만 이사를 세 번 했는데 이사를 할 때마다 택배기사들이 공동 현관문 비밀번호를 알고 있었다”며 “최근 주거 침입 범죄가 계속 발생하는데 불안하다”고 말했다. 신림동에 거주하는 이모 씨(26·여)는 “늦은 시간에 귀가할 때는 불안해서 집 현관문이 저절로 닫힐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손잡이를 잡아당겨 서둘러 닫는다”고 했다. 이 씨의 이런 행동은 5월 발생한 이른바 ‘신림동 강간미수 사건’ 때문이다. 당시 한 남성이 집 안으로 막 들어간 여성의 원룸 문손잡이를 잡아 돌리면서 침입하려던 모습이 폐쇄회로(CC)TV에 담겼다.

방범창이 없는 건물도 많았다. 방범창이 설치돼 있지 않은 한 건물은 배관까지 밖으로 드러나 있어 배관을 타고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구조였다. 이날 방범시설 진단에 나선 관악서 경찰은 “새로 지은 원룸은 방범시설이 잘 갖춰져 있지만 오래된 건물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 경찰은 새로 이사한 집의 도어록 비밀번호를 바꾸지 않아 범죄 피해를 보는 경우도 있다며 이사한 뒤에는 반드시 비밀번호를 초기화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지난달 부산 남구에서는 30대 남성이 이사를 간 뒤에도 원래 살던 집의 카드키를 계속 갖고 있다가 여성이 혼자 사는 집에 침입하는 일도 있었다.

경찰청에 따르면 2013년부터 2017년까지 5년간 주거 침입 성범죄는 해마다 300건 이상 발생했다. 서울지방경찰청은 최근 혼자 사는 여성을 노리는 범죄가 잇따라 발생하자 여성안전종합치안대책 추진 태스크포스를 확대 개편하는 등 대응에 나섰다. 송병일 서울경찰청 생활안전부장은 “여성들이 느끼는 불안 요소가 무엇인지 충분히 파악한 뒤 실효성 있는 치안대책을 세워 현장에서 실행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김소영 기자 ks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