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
최악의 선택은 피해봤자 피할 수 없는 사람이나 상황에서 무리해서 벗어나려고 하는 겁니다. 누구나 해당되는 예를 들면, 가족에게서 쉽게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나 형제와 불화가 있어도 피로 맺어진 가족을 버리기는 어렵습니다. 직장도 상당히 그러합니다. 평생직장이라 생각하고 다니다가 어려운 일이 있다고 선뜻 사표를 내기는 힘듭니다. 섣불리 용단(?)을 내렸다가 후회하는 일도 흔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사람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좋든 싫든 삶의 의미를 해석하려 하며 바쁘게 살아갑니다. 답은 쉽게 나오지 않습니다. 삶은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삶의 목표도 중요하지만 찾아내는 의미에 따라 삶이 크게 달라집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좌절하고 고통받고 때로는 극단적인 선택을 합니다. 다행히 내가 상대하는 사람이나 상황이 바뀌지는 않아도 ‘재해석’은 늘 가능합니다. 재해석은 동일 사항에 대해 해석을 달리, 새롭게 해 보는 겁니다. 그렇게 미워하던 아버지에 대해 “그래도 어려운 시절에 온갖 수모와 곤경을 참아내며 뼈 빠지게 일해서 가족이 굶지는 않게 했다”고 새로운 해석을 내릴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 맞이한 곤경을 “내가 이 직장에서 적응력을 키우고 크게 되기 위한 도전과 성장의 기회”로 새롭게 의미를 찾는다면 부담을 줄일 수 있을 겁니다.
재해석이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늘 익숙하게 쓰던 ‘마음의 렌즈’를 통해 세상을 봅니다. 어두운 색깔의 렌즈나 모양이 틀어진 렌즈는 비관적으로, 변형된 형태로 세상을 읽어냅니다. 재해석을 가로막는 막강한 적대세력은 초자아(超自我)입니다. 초자아는 마음의 감독관입니다. 윤리, 도덕, 이상 등 사회가 요구하는 가치관을 도구로 삼아 늘 내게 회초리를 휘두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초자아가 너무 경직되고 강하면 자신의 삶이 힘들고, 초자아가 느슨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줍니다. 욕망이 너무 강해도, 자아(自我)의 조정 기능이 너무 약해도 갈등은 마음을 구속합니다. 그렇게 사로잡힌 마음은 재해석의 여유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갈등의 고리를 풀려면 때로는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재해석은 창의적 작업입니다. 내가 내 삶을 새롭게 만들어내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적당히 맞추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핏덩이로 태어나 부모의 눈치를 보며 성장하며 내 정체성을 키워 왔습니다. 정체성이 숙성되는 혼돈의 청소년기를 거쳐 이제 어른이 되었다면 내 정체성은 내가 지켜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계속 본다면 주유소를 계속 가야만 운행이 가능한 휘발유 차와 같습니다. 어른이라면 휘발유에 더해 전력도 자체 생산하는 ‘하이브리드 차량’ 정도는 돼야 합니다. 주유소에 덜 의존하고 유지비도 적게 듭니다.
재해석의 첫 단계는 혼자 있는 공간에서 내 삶을 말로 풀어서 설명해 보는 겁니다. 녹음을 글로 옮겨 반복해서 읽어 봅니다. 무슨 내용을 어떤 식으로 이야기하고 무엇을 빼놓았는지를 파악하면 내 삶을 더 많이 이해하게 됩니다. 내 삶을 스스로 설명한 바가 합리적인지, 왜곡되어 있는지, 무리한 설명인지, 심지어 떼쓰고 있는지를 살펴봅니다. 내 인생 설명서 초판이 쓸 만한가요? 아니면 급하게 개정판이 나와야 할까요? 거기에 나오는 내 생각이 진정 내 생각인지, 내가 소망하는 일이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일인지요?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맞춘 소망을 내 것들이라고 착각하는 건지요?
나는 내 생각, 감정, 행동의 주체가 돼야 합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삶은 예상과 달리 전개되고 마음의 움직임은 예측이 어렵습니다. 내가 나를 대상으로 간주해, 비판하고 부담을 주고 공격해서 고통을 주는 경우도 흔합니다. 내가 나를 아끼고 사랑하지 않으면 험난한 세상의 삶이 더욱 피곤해질 겁니다. 그래서 삶의 재해석이 필요합니다. 그러려면 도피보다는 직면입니다!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