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 기자
주성하 기자
북한에서 자라 김일성대에서 사상 교육을 받은 나는 자력갱생이란 말을 귀가 헐도록 들었고, 절대 다수의 북한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 단어에 노이로제가 걸릴 정도가 됐다. 그 덕분에 북한식 자력갱생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 잘 알고 있다.
자력갱생은 우선 “우리는 잘못한 게 없다”로 출발한다. 우리는 옳은 일만 하는 좋은 사람들인데 힘센 악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력갱생을 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악당에 대해 적개심을 갖고 인류의 정의라는 대의를 위해 적의 압박에 절대 굴복하지 말아야 한다.
“각자 알아서 살아야 한다”는 어쩌면 북한식 자력갱생의 핵심 본질이다. 자력갱생하라는 지시가 떨어지면 절대로 수령과 국가에 손을 내밀어 ‘심려’를 끼쳐선 안 된다. 굶어죽는 것은 지도자나 국가의 잘못이 아니라 본인이 자력갱생을 제대로 못한 탓이다. 수령이 ‘자력갱생 간고분투(艱苦奮鬪)의 혁명정신’을 가지라고 했는데, 수령의 방침을 제대로 따르지 못했고 혁명정신이 부족해서 죽는 것이다. ‘고난의 행군’ 때 수많은 사람들은 굶어죽으면서도 국가를 원망할 수 없었다.
올해 북한은 자력갱생이란 단어를 어느 때보다 부쩍 강조한다. 내용은 내가 살던 20년 전 그대로다. 올해 4월 김정은은 노동당 전원회의 연설에서 자력갱생을 25번 외쳤다. “우리의 힘과 기술, 자원에 의거한 자립적 민족경제에 토대해 자력갱생의 기치를 높이 들고 제재로 우리를 굴복시킬 수 있다고 혈안이 돼 오판하는 적대세력에게 심각한 타격을 줘야 한다”는 게 요지였다. 자력갱생을 해야 하는 원인을 100% 미국 탓으로 돌렸다.
북한 어용매체들의 선전전도 빠질 수 없다. 노동신문은 5월 1일자 사설을 통해 “자력갱생은 혁명가와 가짜 혁명가, 애국자와 매국자, 충신과 배신을 가르는 시금석”이라고 강조한 뒤 “남에 대한 의존심과 수입병, 패배주의 같은 사상적 병집을 불사르자”고 주장했다. 자력갱생에 토를 달면 가짜 혁명가, 매국자, 배신자가 되는 셈이다.
이 신문은 또 이달 14일자 논설에서 “자력갱생은 조선혁명의 영원한 생명선이며 국가의 자주적 존엄과 주민의 삶을 지키기 위한 유일무이한 혁명방식”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이어 “현 시기는 정신 대 정신이 대결하는 시대로, 신념을 버리고 환상과 의존심, 패배주의에 사로잡히는 것은 투항이고 변절이며 오늘날 자력이냐 의존이냐 하는 문제는 사느냐 죽느냐를 판가름하는 운명적인 문제”라고 썼다. 생사가 자력갱생에 달렸다는 궤변도 어이가 없지만 논설은 ‘자력갱생의 시대’를 이끈다는 김정은을 이순신, 서희보다 백배는 더 용기 있고 지혜로운 지도자인 양 침이 마르게 찬양했다. 그러나 60년 가까이 자력갱생을 외쳐 왔지만 북한의 경제는 현재 외세(중국)에 철저히 종속된 처지라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자력갱생을 피해 온 줄 알았는데, 요새 남쪽에서 자력갱생, 애국, 매국 등 북에서 배웠던 익숙한 표현들과 이분법적 선동 방식을 보게 되니 흠칫 놀란다. 우리가 일본의 수출 규제를 받는 상황이 된 것도 달갑지 않은데 이에 대한 남쪽 권력의 대응 선전마저 북한을 닮아가나 싶다.
나는 확실히 친일파는 아니다. 일본의 오만한 규제에는 온 국민이 함께 뭉쳐 맞서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진절머리가 나는 북한 전제주의식 선동 방식은 정말 싫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