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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벌거숭이’ 공무원[카버의 한국 블로그]

입력 | 2019-07-26 03:00:00


일러스트레이션 김충민 기자 kcm0514@donga.com

폴 카버 영국 출신 서울시 글로벌센터팀장

얼마 전, 사무실에서 자리를 옮겼다. 사실 옮기고 싶지 않았지만 선택권이 없었다. 투덜거리면서 자리를 다 정리하고 생활하다 보니 좋은 점을 하나 발견했다. 옛날 자리는 남쪽을 향해 천장에서 바닥까지 통유리 창문이 있었다. 서울시청 건물은 여름철 실내 온도를 섭씨 26도 이상 유지해야 했고, 온도조절 센서가 건물 다른 쪽에 있어서 내 자리는 늘 26도보다 훨씬 높았다. 종일 돋보기로 햇빛을 통과시켜 어린아이가 개미를 태우는 것처럼 뙤약볕 아래에서 일했다. 새 자리는 다행히 창문과 거리가 멀어 온도에 대해서는 큰 문제가 없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 주 시 법무공지 게시판에 공람된 문서를 하나 보고 좀 아쉬웠다. 제목은 ‘하절기 시원차림 캠페인’. 남성 공무원들은 반바지를 입으라고 권장하는 내용이었다. 사실 주말 초과근무 땐 반바지를 입고 출근한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 평일에는 나는 물론이고 다른 공무원들도 반바지를 입고 일하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다. 다른 직원들에게 물어보니 대부분 이 정책을 알고는 있지만 6년째 실제 반바지를 입은 동료는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용기를 내서 반바지를 입기로 결심했다. 초등학생 때는 계절에 상관없이 거의 매일 반바지를 입었다. 한국의 더운 여름 내내 가능하면 반바지만 입고 사는 스타일인지라 내 옷장에는 반바지가 많다. 어떤 반바지를 입을지 고민을 했다. 지침에 명시한 ‘시원차림’의 기준이 상당히 애매해 부담이 컸다. 찢어진 반바지는 안 된다고 적혀 있었지만 그 외 다른 기준은 없었다. 소재 및 색깔에 대해 결정장애가 생겼다.

나는 다리에 대한 콤플렉스가 전혀 없다. 그래도 첫날 옷을 입으면서 조금 긴장됐다. 서류 가방을 드는 순간부터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전철역으로 가는 길에 다리가 엄청 시원했지만 콩나물시루처럼 꽉 찬 지하철에 타는 순간부터 마음이 달라졌다. 반바지를 입은 일반인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남의 시선을 의식하게 됐다.

시청 입구에선 불안감이 고조되며 조마조마하기 시작했다. 긴바지 차림의 공무원들 사이에서 맨다리 드러낸 내가 마치 벌거벗고 외출하는 그 악몽처럼 느껴졌다. 시청에서 근무한 지 4년이 됐는데도 불구하고 유일한 백인 남성인 나를 보고 놀라는 직원들도 아직 때때로 있다. 그래서 남의 시선을 좀 의식하는데 그날은 더 눈치가 보였다. 그러나 쓸데없는 근심이었다. 적어도 다들 겉으로는 별말이 없었다. “시원차림을 하고 오셨네”라는 멘트 몇 개 이외에는 평범한 날이었다.

점심시간에 다른 팀원들과 시원차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대부분은 비슷한 의견을 냈다. 반바지를 입는 것이 별일이 아니지만 간부의 비판을 받을까 봐 용기를 못 낸다는 것이었다. 오후에 일부러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다녔다. 역시 부정적인 반응은 전혀 없었다. 다만 여직원 몇 명에게 마치 성희롱 비슷한 멘트 몇 개를 들었을 뿐이다. “불쾌하다”고 말을 못 하겠지만 내가 여직원 다리에 대해 뭐라고 말하지 않는 것처럼 그들도 내 다리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가벼운 마음으로 퇴근했다. 빗길에 반바지의 또 다른 장점을 발견했다. 비 오는 날에 바지가 젖으면 무지 불편하지만, 반바지 차림일 때는 그렇지 않았다. 이 실험을 시작했을 때 한국과 영국의 문화충돌에 대해 쓸 내용이 많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너무 얌전한 하루를 보내서 다른 주제의 글을 쓸까도 생각했다. 친구에게 물어보니까 SK 같은 대기업에서도 반바지를 입는 직원이 여럿 있다고 한다. 어차피 근무할 때는 결과물이 가장 중요하니까 눈치 안 보고 본인의 맡은 일만 잘하면 반바지를 입든, 치마를 입든 온당한 범위 안에서 복장은 별 상관없지 않을까.

아, 이 이야기에 뜻밖의 반전이 하나 있긴 있었다. 반바지에 대해서는 다들 별말이 없었는데 남방의 목 아래 두 번째 단추를 풀어 쇄골을 약간 내놓고 다닌 것에 대해 어이없게도 여러 명에게서 “그거 너무 과도한 노출이 아니냐”는 말을 들었다. 하루 종일 다리에 신경을 쓰느라 놓친 부분이다.

폴 카버 영국 출신 서울시 글로벌센터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