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살인의 추억’과 배우 전미선
2003년 개봉한 봉준호 감독 영화 ‘살인의 추억’의 한 장면.
영화 ‘살인의 추억’(2003년)은 거듭되는 살인과 치안의 실패를 긴 시간 묘사한다. 카메라의 안내를 따라, 관객들은 무능한 형사들과 함께 논두렁과 골목을 분주하게 그러나 덧없이 뛰어다닌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미제(未濟) 사건이 주는 피로와 심연에 공감하게 된다.
관객들이 연쇄살인 사건을 추체험(追體驗·다른 이의 체험을 내 것처럼 느낌)하는 그 시간은 동시에 한국 현대사가 거쳐 온 야만의 시간이기도 하다. 현대성을 성취하기 위한 그 분투의 시간 속에서 사람들은 죽고, 죽이고, 도망가고, 추적하고, 고문하고, 그러다 마침내 늙어간다. 영화 살인의 추억은, 한국인이 과로 속에서 동분서주하다 결국 무언가에 실패하는 이야기다.
이 정물화의 또 다른 주인공은 주변에서 풀을 뜯는 흑염소다. 한국 현대사에 평화와 휴식의 상징이 있다면 비둘기가 아니라 반드시 흑염소여야 한다. 한국 현대사 속의 휴식이란 지속되는 권태의 시간이 아니라, 곧 다시 질주해야 할 이들이 아주 잠깐 누리는 보신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오래 쉴 수 없다. 이제 흑염소를 고아 먹고 나면, 잠재된 ‘K력(한국의 힘)’이 깨어나 다시 질주하게 될 것이다. 흑염소의 시간이 지나자, 영화는 다시 파국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한다.
영화 밖에서도 한국인의 시간은 바삐 흘러갔다. 살인의 추억 이후 배우 전미선은 다양한 영화, 연극, TV 출연을 통해 숨 가쁜 행보를 이어갔다. 결국 유작(遺作)이 되고 만 영화 ‘나랏말싸미’의 개봉을 한 달도 채 남기지 않았던 지난달 29일, 전미선은 연극 ‘친정엄마와 2박 3일’ 공연을 위해 방문했던 전북 전주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에 따르면, “타살 흔적은 없었고 유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는 끝내 연쇄 살인범의 손을 피해 살아남지만, 현실 속에서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전 씨가 최근 가족이 사망하고 어머니까지 병상에 있어 슬픈 감정을 많이 느낀 것 같다.” 그러나 사람을 사지(死地)로 내모는 어두운 힘에 대해 누가 감히 단언할 수 있겠는가.
영화 속 어떤 순간은 회화처럼 박제되더라도, 영화 밖의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흘러, 정지한 이미지에마저 새로운 의미를 덧대어 놓는다. 전미선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이제 살인의 추억 흑염소 장면은 더 이상 평화와 휴식만을 상징하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 죽음을 피하더라도 현실에서는 죽음을 선택할 수 있음을, 영화 속에서는 잠시나마 쉴 수 있을지 몰라도, 현실에서는 과로와 번민을 벗어날 수 없음을, 그 장면은 상징하게 되었다. 배우 전미선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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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미국 하버드대에서 사상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브린모어대교수를 지냈다. 영문 저서로 ‘A History of ChinesePolitical Thought’(2018년)가 있으며, 에세이집으로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가 있다.199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의 첫 당선자다. 사상사와 의미사의 관점에서 동아시아의지적(知的) 전통 및 비교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