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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는 다 어디로 갔을까[서광원의 자연과 삶]〈6〉

입력 | 2019-07-29 03:00:00


서광원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장

주말이면 도시 부근 산들은 사람들로 붐빈다. 그런데 예전에 흔히 봤던 모습이 없다. 두 손을 모아 입에 대고 “야∼호!”를 외치는 사람이 없다. 어쩌다 아이들이 하는 것 외에는 말이다. 사람들이 많아 창피해서 그럴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더 큰 이유가 있다.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메아리가 들려오지 않는다. 목청껏 외치면 누군가 화답하는 듯 우렁우렁 들려오는 소리가 있어야 자꾸 하게 되는데 온 산이 묵묵부답이니 왜 하겠는가? 할 마음이 안 난다. 도대체 그 신기하고 정겹던 메아리는 다 어디로 갔을까? 지금도 식목일이면 들을 수 있는 ‘메아리’라는 동요가 있다. 유치환 선생이 작사한 노랫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산에 산에 산에는 산에 사는 메아리/언제나 찾아가서 외쳐 부르면/반가이 대답하는 산에 사는 메아리/벌거벗은 붉은 산엔 살 수 없어 갔다오.’ 벌거벗은 붉은 산에는 메아리도 살 수 없으니 ‘메아리가 살게시리 나무를 심자’는 가사다. 나무를 심으면 메아리가 더 잘 살 거라는 희망이 들어 있다.

그런데 선생이 몰랐던 게 있었다. 나무가 많을수록 메아리가 잘 살 것 같지만 사실은 반대라는 것을. 메아리는 숲이 우거진 곳에선 살지 못한다. 숲이 소리를 흡수해 버리기 때문이다. 요즘 우리나라 숲들이 빽빽하다 싶을 정도로 우거져 있으니 묵묵부답일밖에. 우리 생각과는 반대로 메아리는 벌거벗은 산에 잘 산다. 소리를 반사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제 메아리는 영영 사라진 걸까?

형형한 눈빛을 가졌던 법정 스님이 살아생전 경남 창원 강연에서 “이 세상에 메아리가 있다”고 하신 적이 있다. ‘영혼의 메아리’가 그것이다. “한 사람이 잘하면 그것이 주변으로 퍼지는 메아리가 되고, 그 메아리가 또 다른 메아리를 만든다”면서 이런 메아리가 울려 퍼지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했다.

다른 사람이란 크게 보면 누구도 아닌 바로 ‘나’이니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이야말로 자신을 돕는 것이다. 무엇보다 마음이 가야 나눌 수 있는 것이니 부드러운 말이라도 나누는 게 좋다는 게 첫 번째다. 그래, 그렇지. 고개를 끄덕이며 보고 있는데 다음 말이 화살처럼 날아와 푹 꽂혔다. “도울 수 없다면 해를 끼치지 마라.” TV로 강연을 보고 있었는데도 가슴이 서늘했던 기억이 새롭다.

스님의 말씀에 의하면 옷깃을 스치는 인연에도 차이가 있다. “영혼끼리 시간과 공간을 함께함으로써 서로에게 기쁨을 주는” 메아리 같은 게 만남이라면, 마주침은 그저 바람처럼 지나가는, 의미 없는 것이다. “마주침에는 영혼의 메아리가 없다. 영혼의 메아리가 없으면 만나도 만난 게 아니다.” 산에 살았던 분이 산 메아리를 걱정하지 않고 사람 사는 세상의 메아리 걱정을 했다. 우리 스스로 살아 있는 메아리가 되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서광원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