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벌이 있다는 건 나쁘지 않다. 성취할 뚜렷한 목표를 설정해 주기 때문이다. 프랑스 화가 폴 고갱에게도 라이벌이 있었다. 야콥 메이어 드한이라는 네덜란드 화가 친구였다. 그림 실력으로는 전혀 맞수가 되지 않았지만 고갱은 그에 대한 패배감을 평생 안고 살았을 뿐 아니라 그의 초상을 야만인의 모습으로 그리곤 했다. 왜 그랬을까?
1891년 원시의 순수미를 찾아 남태평양의 타히티섬으로 떠난 고갱은 1901년 타히티보다 더 외딴섬인 히바오아섬으로 이주해 말년의 걸작들을 남겼다. 고갱이 죽기 1년 전에 그린 이 수수께끼 같은 그림 속에도 야콥의 모습이 등장한다. 화면 가운데 여인은 토호토아라는 원주민 여성으로 고갱은 그녀를 애니미즘(무생물에도 영혼이 있다고 믿는 것)의 화신으로 그렸다.
뒤에는 원주민 청년이 부처의 모습으로 앉아있고, 그 왼쪽에 있는 남자가 바로 야콥이다. 고갱은 친구를 빨간 머리에 뾰족한 턱을 손에 괴고 탐욕스런 눈빛으로 앞을 응시하고 있는 유대 기독교인으로 묘사했다. 애니미즘을 모든 종교의 기원으로 보았던 당시 유행했던 사상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지만 친구를 욕심 많고 교활한 모습으로 묘사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타히티로 오기 전 고갱은 야콥과 함께 프랑스 바닷가 마을 르플뒤의 한 여관에 공동 작업실을 차렸다. 야콥은 절대 고갱의 예술적 경쟁상대가 될 수 없었지만 연애에 있어서는 한 수 위였다. 둘 다 여관 주인 마리 앙리를 좋아했지만 그녀의 선택은 야콥이었다. 고갱은 어느 정도 예술적 성취는 이뤘지만 가난했고, 야콥은 네덜란드의 부유한 유대인 사업가 집안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마리가 야콥의 아이를 임신하면서 야콥은 고향으로, 고갱은 타히티섬으로 떠난 뒤 두 친구는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았다. 야콥이 죽은 지 7년 후 그린 그림인데도, 고갱은 여전히 그를 교활하고 욕심 많은 야만인의 모습으로 묘사했다. 예술의 라이벌은 그리움의 대상이지만 사랑의 라이벌은 죽기 전까지도 용서가 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이은화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