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김순덕의 도발]복수를 하려면 아일랜드처럼 Ⅱ

입력 | 2019-08-01 17:30:00


지난주는 휴가였다. ‘복수를 하려면 아일랜드처럼!’을 올려놓고 낯선 곳에 도착해 보니 댓글이 난리였다(고맙게도 네이버 댓글에선 맞짱 토론하자는 분도 있었다). 후속 칼럼을 쓸 작정으로 가져온 랩톱은 40도 넘는 불더위 때문인지 말을 듣지 않았고, 격주로 쓰는 신문칼럼은 건너뛰기로 한 까닭에 나는 그런 악플을 보고도 목매달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릴 길이 없었다.

진짜 최고의 피서지(회사)로 돌아왔으나 상황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일본은 보복조치 2탄(백색국가 배제)을 예고했고, 우리의 집권당 싱크탱크는 “한일 갈등이 내년 총선 영향에 긍정적”이라는 보고서까지 뿌려댔다. 그래서 나는 내 글에 (분노로) 관심을 표해 주신 독자님들에게 답장을 하는 식으로 후속 칼럼을 쓰기로 했다.

지난달 15일 문재인 대통령은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에서 “결국 일본 경제에 더 큰 피해가 갈 것임을 경고한다”며 비판했다. 오른쪽 사진은 한일 갈등으로 일본 제품 불매 운동을 벌이는 시민들. 청와대사진기자단·동아일보DB


●아시아의 4龍 중 하나였던 한국

먼저, 아일랜드처럼 작은 나라와 우리나라를 비교하는 게 말이 되느냐는 지적이 있었다. 맞다. 영국 옆에 붙어있는 아일랜드 섬 크기가 영국(24만3610㎢)의 거의 3분의 1인데 거기서 영국령인 북아일랜드를 뺀 아일랜드 국토(7만282㎢)는 한반도의 3분의 1, 남한의 약 82% 크기다. 2017년 인구는 501만 명, 우리나라의 10분의 1 수준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보다 작은 나라와 비교하면 왜 안 된다는 건지 모르겠다. 그럼 우리보다 큰 미국이나 일본과 늘 비교하는 건 정상인가? 게다가 한때 우리는 ‘아시아의 4마리 용’ 중 하나로 대만, 홍콩, 싱가포르와 비교되곤 하던 과거를 갖고 있다.

한때 ‘아시아의 4마리 용’으로 한국과 함께 비교됐던 홍콩의 야경.


1992년 에즈라 보걸이 ‘아시아의 네 마리 작은 용’ 책에서 우리나라와 이들 국가를 아시아의 경제 기적으로 소개한 걸 비롯해 2000년대 초반까지 숱하게 한 묶음으로 언급될 때는 왜 우리가 코딱지만 한 저들과 비교되느냐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런데 우리와 역사와 기질이 비슷한 아일랜드와 비교해선 안 될 이유가 뭔가(덕분에 찾아본 3용의 크기와 인구는 다음과 같다. 대만 3만5195km²에 인구 약 2300만 명 /홍콩 1104㎢ 인구 740만 명/ 싱가포르 692.7㎢ 인구 567만 명).

● GNI에서도 아일랜드는 부자나라

아일랜드엔 애플, 구글 같은 외국투자기업이 많아 국내총생산(GDP)이 영국보다 높은 것이 당연하다고 비판한 독자님도 적지 않았다. 수준 높은 지적이고 맞는 말씀이다. GDP에는 아일랜드 비거주자가 제공한 노동, 자본 등 생산요소에 의해 창출된 것이 포함돼 있어 1인당 GDP를 그대로 국민소득으로 보면 왜곡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나라의 파격적으로 낮은 법인세(12.5%)에 매료돼 세계적 정보기술(IT)기업과 금융회사들이 몰려드는 것이고, 그래서 아일랜드는 경제 위기에서 빠르게 벗어났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세계가 법인세 감세 경쟁을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아일랜드는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매력적인 투자처로 통하고 있다. 출처 아이리시타임스


아일랜드 경제 수준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외국기업이나 외국인이 생산한 재화와 서비스를 뺀 국민총생산(GNP)을 봐야 한다(지난번에 이것까지 쓰려다가 빼먹은 것이 불찰이다. 글이 길어지면 독자들은 그만 읽고 바로 댓글로 넘어간다는 불안감에 그만…). 실제로 아일랜드 정책 당국자들은 (현명하게도) GNP를 선호한다고 2015년 파이낸셜타임스는 소개한 바 있다.

●부활의 핵심은 외국인 투자였다

그럼에도 이 소리 저 소리 나오는 게 싫었던지 아일랜드는 보다 정확한 소득 통계를 위해 국민총소득(GNI)을 강조한다. GNI는 GDP에다 교역조건 변동에 따른 실질 무역손익을 더한 것이다. 하하 이것도 아일랜드 수준이 영국보다 높다. 요컨대 내가 강조하고 싶은 건, 아일랜드는 경제로 식민지 종주국을 능가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는 점이다.


2001년 처음으로 영국을 추월했다가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거의 따라잡힌 아일랜드였다. 획기적 구조개혁 조치가 탄력을 받으면서 2014~2017년 OECD 최상위 성장률을 기록한 과정은 감동적이다. 부활의 핵심은 ‘외국인 투자유치·수출확대’에 기반을 둔 켈틱타이거 모델의 복원이었다(강유덕 한국외대 교수 ‘경제위기 이후 아일랜드 경제의 회복과 그 요인에 관한 연구’).

아일랜드가 애플 같은 글로벌 디지털기업에 지식재산권 특례조항(Patent Box) 등 강력한 조세회피 특례조항수단을 제공해 외국인직접투자(FDI) 유입이 높게 나오는 것도 사실이다. 2015년 GDP가 전년 대비 26.3% 급증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이 불가사의한 현상이라며 아일랜드 전래동화에 등장하는 요정 이름을 붙여 ‘레프러콘 경제학(Leprechaun Economics)’라고 비꼬았을 정도다.

폴 크루그먼. 동아일보DB

크루그먼은 1998년 IMF처방이 아시아 경제를 망친다고 비판했던 사람이다(그러나 우리 경제는 살아났고 결과적으로 ‘위장된 축복’이라는 소리까지 나왔다). 작년에 방한해선 주 52시간제를 더 줄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안 그래도 연구소까지 52시간에 묶인 나라인데 일본에 영구 기술속국으로 살아가라고?

●아일랜드 부활 배울 수 있을까

2010년 말 850억 유로의 구제금융을 받은 아일랜드는 죽을힘을 다한 구조개혁으로 2013년 유로존 빚쟁이 국가 중 가장 먼저 구제금융을 졸업했다. 국제사회의 신용을 회복하기 위해 ‘공무원부터’ 임금을 삭감했고(공무원부터 임금을 올리는 등 좋은 건 제일 먼저 차지하는 어떤 나라와 대조적이다), 외국기업을 더 많이 유치하기 위해 사회연대협약을 파기하는 등 비상한 조치를 취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아일랜드의 실직자들이 거리로 나왔다. 출처 위키피디아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면 안다. 걸핏하면 파업하는 강성 노조가 버티는 나라라면 어느 외국기업이 들어와서 비즈니스 하겠나. 해외투자기업이라 해도 거기서 일하는 사람은 그 나라 사람들이 많다. 그게 다 임금으로 개개인에게 돌아오고, 소득세로 정부에 들어와 국민 복지에 쓰인다.

아일랜드의 성공모델을 우리가 들여오기엔 난관이 많기는 하다. 무엇보다 영어가 공용어가 아니고 EU 같은 단일시장도 없다. 아일랜드의 가톨릭처럼 나라와 국민을 하나로 모아주는 종교가 없다는 점도 안타깝다(노사정 사회적대타협이 가능한 문화도 가톨릭에서 비롯됐다는 연구가 있다. 북아일랜드 분쟁에 종교 차이가 작용했던 역사를 떠올리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미 아일랜드의 사회적대타협이 무너진 것도 모르고 이걸 따라해야 한다고 외치는 세력을 보면 복장이 터질 지경이다.

●Factfulness는 우리에게도 중요

아일랜드가 암만 잘살게 됐대도 골고루 누릴 수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따질 수 있을 것이다. 아일랜드의 금융위기를 자초했던 고질적 연고주의는 우리의 지연, 학연 뺨친다는 지적도 없지 않다. 그러나 아일랜드는 부실은행 빚을 정부가 떠맡고는 피나는 금융개혁을 단행했고 ‘성장을 통한 분배’를 가속화하기 위해 과감한 노동개혁을 강행했다. 그 결과 우리 정부가 소득주도성장과 같은 말처럼 외치는 ‘포용적 성장지수’에서도 아일랜드(8위)는 영국(21위) 앞이다.


이 자료를 찾으면서 나도 놀랐다. 우리의 대통령은 우리나라 불평등이 미국 다음으로 심하다며 소득주도성장을, 요즘엔 포용적 성장을 목 놓아 외치고 있지만 세계경제포럼이 집계한 2018년 우리나라의 포용적 성장지수는 이미 16위다. GDP는 물론 소득 불평등을 나타내는 지니계수와 다음 세대에 전가될 공공채무까지 포함한 이 지수에서 미국(23위), 일본(24위)까지 앞선 순위다(하하 일본을 이기기는 했다).

문재인 정부가 벌써 성과를 냈나, 싶어 2017년도를 찾아봤다. 한국은 14위다. 미국과 일본은 전년도와 같은 23, 24위였다. 이것이 fact다. 순위가 중요하지 않다고 해도 fact는 중요하다. 말도 안 되는 주장으로 말도 안 되는 정책을 밀어붙이는 정부에 “아니다” 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요즘 ‘팩트풀니스(Factfulness·사실충실성)’이라는 책이 주목받는다. 이 참에 우리도 fact에 근거한 판단을 중시할 필요가 있다. 아일랜드도 그랬다. 민족은 순결하고, 가난은 영광스럽다는 ‘희생자 신화’에서 벗어나자 국익과 실용주의가 성큼 다가온 거다.

●‘슬픈 역사’의 신화에서 벗어나기

우리도 그러했듯, 오랜 식민지 경험을 가진 아일랜드에서 역사 서술이 강한 민족주의적 색채를 띤 것은 당연했다. 민족국가 성립이라는 관점에서 모든 것을 바라봤고, 1922년 아일랜드 자유국 성립 이후엔 일종의 신정(神政)국가처럼 영국에 비해 아일랜드가 문화적으로 우위라고 강조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1845년부터 1849년까지 아일랜드에서 일어난 아일랜드 대기근을 나타낸 그림. 반영감정의 기원이 되기도 했다. 출처 위키피디아


그러나 1930년대부터 신화와 역사를 분리하는 수정주의 역사학 1세대가 나타났다. 1970년대엔 수정주의 역사가 2세대가 등장해 ‘식민주의적 착취를 당했다’라는 식의 서사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민족주의 역사학에서 “하나님이 감자병을 보내셨지만 1840년대 대기근의 원인은 영국”이라고 본다면, 수정주의 역사에선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 대기근이 일어났다’고 본다. 수정주의 역사가들의 강한 도전과 논쟁 끝에 대세는 현재 수정주의의 승리로 기울었다고 박지향 서울대 명예교수는 ‘슬픈 아일랜드’에 썼다.

1980년대 아일랜드가 민족주의적 자립경제를 버리고 외국기업에 활짝 문을 연 데는 이 같은 지식인들의 노력과 시민들의 자각이 크게 작용했다고 본다. 개인의 자유와 다양성의 힘을 믿는다는 점에서 오늘날 아일랜드는 영국보다 훨씬 앞서 있다. 티쇽(Taoiseach)이라고 발음하는 총리 리오 버라드커가 인도 이민 출신의 동성애자인 것만 봐도 안다.

리오 버라드커 아일랜드 총리. 동아일보DB


●언제까지 일본만 탓할 건가

물론 1997년 영국 노동당 총선 승리 후 토니 블레어 총리가 150년 전 대기근으로 인한 아일랜드인의 죽음을 공식 사과하고, 2011년 국빈 방문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다시 한번 진솔하게 사과하는 등 문명국다운 태도를 보인 것도 중요했다. 하지만 이 역시 아일랜드 경제가 받쳐줬기에 가능했다. 아니라면, 영국이 왜 진작 사과하지 않고 아일랜드 경제가 동등해진 다음에야 사과했겠나.

영국의 ‘뻘짓’ 덕분에 잘하면 아일랜드가 통일을 할 수도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영국의 새 총리 보리스 존슨이 유럽연합(EU)과 합의 없이 갈라서는 노딜(No Deal) 브렉시트를 연일 강조하자 북아일랜드 민족주의 정당인 신페인(Sinn Fein)당 대표가 지난달 30일 “그렇다면 영국연방을 탈퇴하고 아일랜드와 통일해야 한다”고 폭탄을 터뜨린 거다.

보리스 존슨 신임 영국 총리. 동아일보DB


상상해보시라. 삼성전자의 시가총액이 2002년 소니를 앞지른 것처럼 우리나라가 일본을 경제로 추월하고, 일본이 뻘짓을 계속하면서 마침내 북한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통일하겠다며 우리에게 손을 내미는 모습을! 천년 묵은 한이 풀리면서 세상에 대해 너그러워질 것 같지 않은가.

●무능한 선조 코스프레 집어치우라

꼭 경제적으로 앞서야만 일본을 이기는 것이냐며 썩어빠진 물질주의를 질타하는 독자도 있었다. 문화적 우위를 따지자면 당연히 우리가 우위다(모든 나라는 언제나 다른 나라보다 상대적 우위에 서있다). 더구나 ‘정신 승리’로 치면 우리 집권세력을 따를 집단이 없다고 확신한다.

경제도 아니고 정신도 아니면, 전쟁으로 일본을 이길 작정인가? 대통령은 그러고 싶은 것 같다. 거북선 횟집에서 식사를 하며, 휴가는 반납하고 경남 거제 저도까지 찾아다니며 연일 이순신 장군을 강조하는 모습은 “내가 바로 (무능한) 선조”라는 표현 같아 보기 민망하다. 의병도 애국심에 불타는 국민이 자발적으로 일으키는 거다. 북에서 탄도미사일을 쐈는지 신형 방사포를 쐈는지도 모르는 정규군이나 만든 집권세력이 어떻게 감히 국민에게 의병 일으키라는 소리를 할 수 있나.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24일 부산에서 시도지사 간담회를 마친 뒤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이날 문 대통령이 단체장들과 오찬을 한 식당 이름이 ‘거북선 횟집’이다. 동아일보DB


아일랜드는 우리의 집권세력이 징글징글하게 증오하는 신자유주의적 해법, 즉 ‘작은 정부, 큰 시장’ 정책으로 식민지 종주국을 이겼다. 여기에 사회적대타협을 맺었다 글로벌 환경 변화에 따라 깨뜨릴 줄도 아는 용감한 정치가 오늘의 아일랜드를 만들었다고 본다. FDI 유치 정책을 지속가능하게 만들려면 뛰어난 자국 인력과 자국 기업을 키우는 것도 필수다.

복수를 하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 김상조 대통령정책실장은 소재산업 육성 관련 우리 신문 인터뷰에서 ‘내일은 우리가 이길 것’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싶다고 했다. 그랬으면 정말 좋겠다. 다만, 민간연구소까지 오후 6시면 불 끄게 강제하는 시대착오적 정책으론 어림도 없다는 게 우리의 비극이다.

김순덕 대기자 doba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