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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의 농업 실정 결국 우리 세금으로 메우나[광화문에서/황인찬]

입력 | 2019-08-02 03:00:00


황인찬 정치부 차장

“최고영도자 동지께서는 문재인 대통령이 남녘 동포들의 뜨거운 마음이 담긴 선물을 보내어 온 데 대하여 사의를 표시하시면서….”

지난해 11월 제주산 귤을 북한으로 보낸 지 닷새 뒤. 북한 노동신문에는 이런 짤막한 기사가 실렸다. 9월 평양 정상회담 이후 북한이 보내온 송이버섯 2t에 대한 답례로 청와대가 귤 200t을 보내자 김정은이 직접 감사의 뜻을 밝힌 것이다.

한때 송이와 귤이 오갔던 남북 관계가 8개월이 지난 지금은 싸늘히 식어 있다. 북한은 5월에 이어 단거리탄도미사일을 최근 잇달아 발사했다. 정부의 5만 t 규모 대북 쌀 지원도 돌연 거부했다. 정부는 이제 쌀을 선적도 못 한 채 추가 도발을 맞은 상황이 됐다.

미국과의 비핵화 협상이 진척되지 않자 한국에 불만과 비난을 쏟아낸 것이겠지만 그래도 쌀까지 거부한 것은 김정은의 잘못된 선택이라고 필자는 본다. 당장 이달 말이면 북한 식량재고량이 바닥을 드러낼 것이라는 게 국가정보원의 평가다. 쌀 지원 거부에 따른 고통은 고스란히 북한 주민들 몫이다. 입만 열면 ‘애민 정신’을 강조하는 김정은의 이중적 태도가 아닐 수 없다. 한 탈북자 출신 연구원은 “식량 사정이 절박한데 쌀을 물리칠 줄 몰랐다”며 허탈해했다.

이런 가운데 자칫 간과되고 있는 것이 바로 식량 부족 사태가 상당 부분 김정은의 ‘농업 실정(失政)’에 책임이 있다는 사실이다. 김정일 사망 이듬해인 2012년 김정은은 만성적인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 ‘포전담당제’를 실시한다. 협동농장의 말단 조직인 분조의 규모를 3∼5명 규모로 축소하고, 수확량에 따른 인센티브를 일부 허용하면서 생산량 증대를 독려한 것이다. 더 많이 생산해봤자 똑같이 나눴던 김일성·김정일 시대와 달리 더 많이 생산하면 더 가져가는, 자본주의적 방식의 도입이다. 연간 350만∼400만 t이었던 곡물 생산량은 500만 t으로 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달콤한 자본주의 맛을 본 게 농부만이 아니라 그들을 통제하는 고위 관료들까지였다는 게 문제였다. 포전담당제가 처음 실시될 때는 수확량을 7 대 3 비율로 당과 농민이 나눠 갖는 구조였다. 하지만 이후 생산량이 늘어 농민이 가져가는 곡물량이 많아지자 당이 가져가는 비율을 슬그머니 늘렸다. 더 열심히 일해도 더 가져갈 수 없는 구조가 돼 버린 것. 결국 농민들이 포전담당제에 흥미를 잃었고, 수확량도 점차 줄었다.

최근 규모를 더 줄여 개인별 포전담당제를 시범 실시했다는 소식도 들리지만 ‘한번 속았던’ 농민들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김정은은 4월 헌법을 개정하면서 공업 부문에 더 많은 경영권을 보장하는 ‘사회주의 기업책임관리제’를 명시했지만 농업에선 별다른 새 해법을 제시하지 못했다. 핵과 달리 쌀을 갖는 방법은 찾지 못한 것이다.

한국 땅을 직접 위협하는 북한의 신종 무기 연쇄 도발이 감행됐지만 정부는 대북 쌀 지원을 계속해서 추진하겠다는 입장이다. 쌀 지원은 인도적 차원의 결정이지만 한편으로는 김정은의 농업 실정을 결과적으로 우리 세금으로 메우는 측면도 있는 것이다. 정부의 대북 쌀 지원 관련 발언과 정책 결정이 보다 신중해져야 하는 이유다.

황인찬 정치부 차장 hi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