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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정복귀 대신 ‘근대적 국가’ 설립 꿈꾼 독립운동

입력 | 2019-08-03 03:00:00

[2019 3·1운동 임정 100년, 2020 동아일보 창간 100년]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2부 <제67화> 황해 수안
수안 천도교인들 문명개화론 수용, 민주-자유-공화 정신 새 정부 추구
임시의정원 헌장 제1조로 이어져




천도교는 3·1운동의 대중적 확산을 위해 ‘조선독립신문’을 발행했다. 당시 일제는 조선인의 신문 발행을 허락하지 않아 지하신문 형태로 발행됐다. 사진은 이종일(앞줄 가운데) 등 조선독립신문 발행의 주역들. 천도교 중앙도서관 제공

수안지역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홍석정 한청일 이영철 등 천도교 지도부는 “우리는 이미 조선 독립을 선언하였고, 현재는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의 시대이니 헌병분대의 관할권을 즉시 인도하라”고 요구했다. 새로운 세상이 열렸으니 일본 제국주의 무단통치의 상징인 헌병대 권력을 넘겨받겠다는 뜻이었다. 천도교인들은 만세운동을 진행할 때에도 ‘조선이 독립됐다’는 말을 주민들에게 자주 했다.

수안 만세운동을 연구한 조규태 한성대 교수는 “수안 천도교인들은 교리강습소를 통해 문명개화론, 계몽주의 등 근대적인 지식을 수용하였고, 그 결과 공화와 자유사상에 입각해 조선 독립을 주장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당시 한반도 서북지역의 천도교인들은 동학의 평등 이념과 ‘개벽’이라는 새로운 세계 질서를 현실화하려는 욕구가 매우 컸다. 이는 일제에 대한 저항뿐만 아니라 전통적으로 서북지방 출신이 집권층으로부터 받아온 차별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다.

수안의 만세운동은 고종의 장례일인 3월 3일에 거행됐다. 이날은 대한제국의 황제를 떠나보내는 기일로 전국 대부분의 지역에서 만세운동을 자제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구축한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에 의하면 현재의 남한지역에서는 충남 예산군에서 5명이 음주 후 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부른 것 외에 만세운동은 전혀 진행되지 않았다.

반면 북한지역은 달랐다. 황해도만 해도 수안을 비롯해 옹진 황주 봉산 등지에서 만세시위가 펼쳐졌고 평안남·북도와 함경남도에서도 만세운동이 있었다. 이들 지역은 대체로 천도교 세력이 강한 곳이었다.

조선독립신문 창간호. 부산박물관 제공

이는 천도교가 3·1운동 주도 이후 일제에서 나라가 독립한다면 왕조 국가로 복귀하는 대신 근대적인 국가 설립을 추구한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천도교가 펴낸 지하신문 ‘조선독립신문’ 제2호(1919년 3월 2일자)는 “근일(近日) 중에 가정부(假政府·임시정부)를 조직하고 가대통령(임시대통령) 선거를 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3·1운동 이틀 뒤에 민주, 자유, 공화 등의 사상에 입각한 새로운 형태의 정부 출현을 선언한 셈이다. 이후 이런 움직임은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에서 출범한 임시정부 입법기관인 임시의정원이 임시헌장 제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을 명시하고, 평등주의와 자유주의를 천명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안영배 논설위원 oj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