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도산법 시행 후 파산이 회생보다 많은 첫 ‘데드크로스’ 코앞에 경기침체에 경쟁력 한계 맞아…외환위기 때와는 다른 이상 징후
경기 김포시 한 산업단지에 공장 임대와 매매를 알리는 현수막이 다수 걸려 있다. [뉴스1]
대통령 앞에서 시연했던 회사도 ‘파산’
하지만 이노비즈 인증을 받은 기업도 위기를 맞는다. 6월 한 달만 해도 이노비즈 인증을 받은 5개 기업이 법원으로부터 파산 선고를 받았다. 레이저 광학기술 분야에서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던 경기 수원시 A사, 영상보안장비 수출로 창업 4년 만에 100만 달러 수출의 탑을 수상한 수원시 B사, 대기업 1차 협력사로 LED(발광다이오드) 관련 부품을 납품했던 인천 C사, 2년 전만 해도 265억 원 매출과 17억 원 영업이익을 올렸던 대전 건축자재 업체 D사, 그리고 3년 전까지 연매출 30억 원을 유지하던 부산 응용소프트웨어 개발사 E사다.
하지만 1년여가 흐른 지금, 이 회사의 대표번호로 전화를 걸면 ‘착신이 금지된 번호’라는 안내가 나온다. A사 파산의 직접적인 원인은 대출금 미상환으로 보인다. 올해 6월 만기가 돌아온 대출금 23억5000만 원을 갚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돈을 갚지 못한 근본 원인은 잇따른 매출 감소와 적자였다. 2015년 75억 원이던 매출이 2016년 37억 원, 2017년 34억 원으로 반 토막이 났고, 2015년부터 2017년까지 3년간 77억 원의 영업적자를 낸 것으로 전해진다. SK텔레콤 측은 “A사 상황을 어느 정도 알고는 있지만, 사정이 어려워진 회사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기는 곤란하다”며 말을 아꼈다.
경영 위기에 봉착했을 때 기업은 법원에 회생 혹은 파산 신청을 한다. 일시적인 자금난을 극복해 사업을 계속하는 것이 회생이라면, 모든 사업을 종결하고 회사 존재를 말소시키는 것이 파산이다. 회생이 수술이라면, 파산은 법인(法人)에 대한 사망 선고다.
청산가치 따져보지도 않고 기업 포기 속출
파산을 원하는 기업이 회생하려는 기업보다 많아지는 첫 ‘데드크로스’ 실현이 임박해오고 있다(그래프1 참조). 대법원이 자유한국당 김도읍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올해 6월 말까지 법인파산 신청 건수가 484건으로 법인회생 신청 건수 497건에 거의 근접했다. 2013년 이후 법인파산과 법인회생 모두 증가 추세인 가운데 회생보다 파산 신청 건수가 더 가파른 오름세를 보여왔고, 결국 역전을 코앞에 두게 된 것이다. 올해 회생 신청은 전년 동기 대비 12%(443→497건) 늘어난 데 반해, 파산 신청은 23%(393→484건) 증가했다. 2004년 ‘채무자 회생 및 파산에 관한 법률’(통합도산법)이 제정된 이래 줄곧 법인회생 신청 건수가 법인파산 신청 건수를 크게 앞섰다는 점을 고려하면 한국 경제에 새로운 이상 징후가 등장한 셈이다. 한편 2013년 1300건에 못 미치던 파산 및 회생 신청 건수는 5년 만인 2018년 1800건에 육박할 정도로 증가했다. 6월까지 누적 신청 건수가 981건인 올해는 2000건 안팎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는 외환위기 당시보다 큰 규모다(그래프2 참조).
기업들은 왜 살기보다 죽기를 택할까. 3년간 서울중앙지방법원 파산부 판사로 재직하다 2009년부터 도산 전문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는 이용운 변호사(법무법인 민)는 “최근 들어 ‘이참에 사업을 접겠다’고 하는 기업인이 늘었다. 제조업, 서비스업 가릴 것 없이 중소기업가들이 요즘처럼 사업하기 어려운 때도 없었다고들 한다”며 “오랜 기간 피로가 누적돼왔고 곪아터지기 전에 사업 자체를 포기하려는 것”이라고 전했다. 경기침체가 장기화하고 회복 기미가 좀체 보이지 않는 가운데 최저임금 인상, 주52시간 근무제로 인한 고정비 증가 부담까지 더해지자 사업 의지를 잃은 기업이 늘었다는 얘기다. 역시 도산 전문인 윤소평 변호사(법무법인 이담)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회생을 원하는 의뢰인이 많았는데, 올해 들어 파산을 알아보려는 의뢰인이 더 많아졌다”고 말했다. 그 이유에 대해 윤 변호사는 “회생 조건이 갈수록 까다로워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전자제조산업 관련 박람회를 찾은 업계 관계자들(왼쪽)과 영화 ‘국가부도의 날’에서 원청업체의 어음 부도로 갑작스럽게 도산 위기를 맞은 중소업체 대표 갑수. 최근에는 외환위기 때와 달리 기업 자체의 경쟁력 악화로 파산에 내몰리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뉴시스, 사진 제공 · CJ ENM]
회생에 성공하려면 해당 기업의 계속기업가치가 청산가치보다 높다는 조사위원들의 조사 결과가 있어야 한다. 향후 10년간 회사를 운영해 얻는 이익이 당장 청산했을 때 얻는 이익보다 크다고 판단돼야 회생 절차가 지속된다. 그런데 글로벌 경제성장이 둔화되고, 국내 경기도 좋지 않자 계속기업가치를 인정받기가 예전보다 어려워졌다. 윤 변호사에 따르면 예전에는 거래처와의 양해각서(MOU)를 제출하면 MOU상 계약대금의 60~70%를 향후 실현할 매출액으로 간주해줬다. 그러나 최근에는 본 계약서가 아닌 이상 ‘미래의 매출’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매달 법원에 법인회생 혹은 법인파산을 신청한 기업들을 검토하는 대체투자회사의 김모 대표는 “최근 들어 회생 신청 기업 중 인수할 만한 대상을 찾기가 어렵다”고 전했다. 인수할 가치가 있는 회사는 미리 인수자를 정해놓은 뒤 회생 절차를 밟고, 그렇지 않은 회사는 경쟁력이 없어 인수할 가치가 없어서다. 특히 연매출 50억 원 이하로 규모가 작거나, 한두 개 거래처에만 의존하는 회사가 많아졌다고 한다. 파산을 신청한 회사들은 투자 대상으로 검토조차 되지 않는다. 대부분 사업성이나 시장 내 지위를 상실하고 공장 정도만 가진 회사들이기 때문이다.
법인 및 개인의 파산·회생 사건을 신속하게 처리하기 위해 2017년 3월 개원한 서울회생법원. 올해 6월까지 서울회생법원에 신청된 법인파산 건수는 236건으로 전년 동기(189건) 대비 25% 늘었다. [뉴스1]
대기업이 투자한 첨단업체도 곤경…“외환위기 때와 달라”
김 대표는 “10년 전인 글로벌 금융위기 때는 달랐다”고 말했다.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갑자기 금리가 오르고 대출 만기가 연장되지 않는 등 일시적인 외부 요인으로 어려움을 겪은 회사들이 법원에 회생 또는 파산 신청을 했다. 이들 기업 가운데 경쟁력을 가진 회사는 투자 제의를 받았다. 1997년 외환위기 때도 비슷했다. 회생금융(Debtor In Possession financing·DIP) 분야를 연구하는 권세훈 상명대 경영학부 교수는 “외환위기 때는 돈 구하기 어렵거나 원청업체 파산으로 대금을 받지 못한 회사들이 자신의 경쟁력과 별개로 도산 위기에 몰렸다”며 “최근에는 내재적으로 한계에 다다른 기업들이 파산하고 있어 외환위기 때와는 도산 성격이 사뭇 달라졌다”고 진단했다.
체불 임금 17만 명, 체당금 지급 늘어 중대 고비
“파산 원인 면밀하게 분석해야”
기업의 회생·파산 현황은 경기 후행지표로 여겨진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최저임금 인상으로 산업 여건에 비해 노동비용이 급증해 파산에 이르게 되는 회사가 많아져 법인파산이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이를 전반적인 경기 하락 신호로 인식하고 정부가 경기를 살리려는 노력에 매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인실 서강대 경제대학원 교수는 “글로벌 경기가 하락하고 국내 경제도 어려운 가운데 새로운 산업도 일으키지 못하는 상황에서 파산하는 기업까지 늘어나는 것은 한국 경제가 매우 중요한 시점에 이르렀다는 의미”라며 “법원이 어떤 기업이 어떤 이유로 파산하는지 면밀하게 분석해 정부가 경제 및 산업 정책을 짜는 데 참고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강지남 기자 layra@donga.com
[이 기사는 주간동아 1200호에 실렸습니다]